■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3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3편
내명부에 대한 안정적인 지도력은 후궁 문제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본인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 잘 모르지만, 후궁에 대해 질투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으로 일찍이 태종과 세종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소헌왕후는 총애 받는 후궁은 더 대접하였고, 그들을 신뢰해 여러 자녀들을 후궁들에게 양육하도록 했다. 8남 2녀 중 막내인 영응대군의 양육은 신빈에게, 6남 금성대군의 양육은 태종 후궁 의빈에게, 문종의 자녀인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은 혜빈에게 맡겼다.
하지만 소헌왕후는 마냥 부드러운 모습만이 아니라 강단있는 성품도 있었다. 세종 21년(1439)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을 하여 세종이 그 관련자들을 벌주고 임영대군의 직첩까지 빼앗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린 것이 소헌왕후였다. 평소 후궁 뿐 만 아니라 자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던 소헌왕후는 임영대군의 유모를 통해 이 일을 전달받았고 이를 임금에게 알렸다. 소헌왕후는 친자식의 비행이라고 하여 눈감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문종의 폐세자빈인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의 만행도 소헌왕후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를 통해 밝혀졌다. 평소 소헌왕후의 내명부에 대한 통솔력에 인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강단있는 성품과 통솔력 있는 소헌왕후가 있었기에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했던 내명부라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세종 8년에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 당시 사냥을 이유로 지방에 나가 있던 세종대왕과 세자 문종을 대신해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 화재는 보통 것이 아니라 천 가구가 넘는 집을 태웠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게다가 이 당시 그녀는 후일의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살아생전에 세종과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세종은 그녀를 깊이 존경하였다고 한다.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면 항상 세종이 친히 일어서서 공경의 예를 표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정 몰락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던 소헌왕후.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그녀는 아마도 드러낼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불교에 의지했을 것이다. 소헌왕후는 결국 원망과 미움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고, 가정와 왕실의 평안이라는 한 단계 더 높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 소헌왕후가 있었기에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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