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2편
■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심씨 2편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선양(禪讓)할 때, 병권은 넘겨주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상왕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소헌왕후가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조심조심 처신했건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출발하기 전에 환송연이 열렸는데,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왕인 태종이 볼 때는 ‘감히 외척이 권세를 부리며 날뛰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沈泟)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세종이 아닌 상왕(上王: 태종)이 모두 쥐고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말았다. 심온은 반역(叛逆)의 수괴(首魁)로 지목되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국경선을 넘자마자 바로 체포되었고, 수원으로 유폐되어 곧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뒤이어 심온의 동생 심정도 화를 당하고, 친정어머니는 관노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소헌왕후 심씨의 친정집은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이 일로 폐비(廢妃)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크고 왕자를 출산했고 당시에도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이었기에 폐비가 되지는 않았다. (1426년(세종8년), 어머니 안씨와 가족들은 천안(賤案)에서 제명되고 직첩이 복원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소헌왕후도 자식문제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 향의 아내들 때문이었다. 세자빈을 두 명이나 쫓아내야만 했다. 첫째 세자빈은 열여덟 살인 상호군 김오문의 딸이었다. 하지만, 열네 살의 세자는 세자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릴 때 같이 놀던 중전의 시비인 효동과 덕금이와 더 어울렸다. 세자빈 김씨는 질투심이 발동하여, 남편 세자의 사랑을 받겠다고 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하다가 결국 들통이 나서 퇴출당하고, 친정 부모님과 함께 독약을 먹고 죽었다.
둘째 세자빈은 세자와 동갑인 봉여의 여식이었다. 이때 후사를 위해서 세자의 후궁도 들이게 된다. 그것도 셋이나.......질투심 많은 봉씨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되었다. 욕정을 참지 못한 세자빈은 시비(侍婢)와 동성연애를 하고 만다. 조선왕조 최초로........결국 쫒겨난 세자빈 봉씨가 친정으로 돌아오자, 아버지 봉여는 딸을 허리띠로 목 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 죽었다.
또한, 일생동안 가족에 대한 많은 비극을 겪었던 왕비이다. 그녀가 죽기 전에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던 것이다. 그녀가 30대가 되고 나서 큰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을 때 5남인 광평대군이 요절하고, 이듬해 7남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서 그 충격에 소헌왕후마저 건강이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비가 되던 해에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인 심온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했다가 사위에 의해 복권된 뒤 세상을 떠났다. 또한 자신의 큰며느리인 현덕왕후가 원손을 낳고 하루 만에 요절했다. 이런 불행한 가족사에 소헌왕후 본인도 힘들어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또한, 태조의 기세에 눌려 친정집의 몰락을 방관한 세종의 태도, 이에 대해 소헌왕후 심씨는 아무런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못내 서운한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서 소헌왕후는 유달리 불교에 매달렸다고 한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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