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 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 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서인이 광해군을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이다. 광해군은 정치 개혁 측면에선 분명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무리한 정치 보복으로 비판을 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 감각만큼은 조선 역사상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왕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는 매우 정세가 불안정했다.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주변 국가를 위협했는데, 특히 명나라 입장에서 후금의 탄생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탄생지가 명나라의 변방(邊方)인 만주 땅인데다가, 후금의 성장은 명나라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광해군에게 명나라의 이 제안은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당시 조선에게 시급한 문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후폭풍을 앓고 있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신하 대다수가 명나라는 조선이 받들어 모시는 ‘부모의 나라’이자,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가 있으니, 명의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약해진 국력과 더불어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는 후금의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명나라는 당시 국내에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부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고, 후금은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新興) 강국(强國)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상태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며 후금을 맞상대했다가는 조선에게 매우 큰 피해가 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국인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파병해준 ‘은혜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파병에 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의 신하들은 태업(怠業)을 하였고, 영의정 박승종은 아예 병(病)을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는 등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