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권력이 있는 지방 호족의 딸과 결혼을 하여 인척관계를 맺는 혼인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무려 25명의 배다른 형제를 둔 왕건의 아들들은 왕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 왕건 사후(死後) 한동안 왕권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이 죽고 난 뒤 943년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가 2대 왕 혜종이 되었지만, 오씨는 다른 후궁들에 비해 세력 기반이 약해 혜종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왕건도 살아생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왕무를 태자로 삼으면서 측근들에게 "태자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 순성왕후 유씨의 아들 왕요·왕소 형제는 혜종이 왕이 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렸다. 어머니 유씨가 충주의 힘 있는 호족이자 장군인 유긍달의 딸이었기에 왕요와 왕소를 왕으로 만들려는 세력은 점점 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혜종의 측근들은 "왕요 형제가 왕위를 넘보고 있으니 이들을 애초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혜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시집 보내 그들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왕요 형제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왕이 된 지 2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혜종이 왕요 형제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려사\에는 혜종이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병 이름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혜종이 살해 위협을 걱정하며 늘 군사를 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타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혜종이 죽은 뒤 왕요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3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왕소가 4대 왕 광종이 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노비해방)을 도입해 외척과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고려 왕실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광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신하를 숙청하고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을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