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고풍과 고려양 1편
■ 몽고풍과 고려양 1편
몽고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전에 돌입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로 옮겼던 왕실은 39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삼별초는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하여 계속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삼별초를 해산하였고, 삼별초는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제주도에서 진압되고, 고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몽고는 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꾼 뒤 고려를 지배하고 간섭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임금의 이름에 원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충’을 넣어 지을 정도로 굴욕적인 간섭을 받았다. 충렬왕 이후 고려의 왕들은 왕세자가 되면 어릴 때부터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 했다. 자연히 몽고말을 쓰고 몽고 풍습이 몸에 익게 되었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만 했다. 원이 고려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이를 통해 싫든 좋든 각종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고려에 들어온 몽고의 풍습을 ‘몽고풍’이라 한다. 처음에는 주로 상류층 귀족들 사이에 퍼졌으나 차츰 일반 백성들에게도 몽고풍이 유행했다.
우리의 전통 풍습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가운데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 꽤 많다. 여자들이 귓볼을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나 전통 혼례에서 결혼식 때 신부들이 입는 원삼과 머리에 쓰는 족두리, 그리고 얼굴에 찍는 연지·곤지가 대표적인 것이다. 족두리는 원래 몽고 여자들이 쓰는 외출용 모자였는데, 고려로 전해지면서 혼례용 모자로 사용되었다. 또, 이마와 양쪽 볼에 빨갛게 연지·곤지를 찍는 것은 몽고 여자들이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한 풍습이라고 한다.
언어에도 몽고풍이 남아 있다. 우리말의 벼슬아치, 갖바치, 장사치 등 단어에 ‘치’가 붙는 것은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치’는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 글자이다. 또,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가 자기 아내인 세자빈을 가리키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황제나 귀족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갓난애란 뜻의 높임말을 가리키는 ‘아기’, 시집 안 간 처녀에 대한 경어를 가리키는 ‘아가씨’ 등은 주로 원의 궁중에서 쓰이던 단어로 원 출신 공주들의 영향으로 고려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몽고는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목장으로 운영하기 적당한 한라산 200~600m 지역에 말을 키우게 해서 제주도를 말 공급지로 삼았다. 그래서 한라산 중턱에 초지대가 발달하게 되었고, 제주도에 지금도 말이 많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몽고어의 흔적은 특히 제주 방언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고어에서 조랑말은 ‘조로’라고 하고 얼룩말을 ‘알락’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주도에서 조랑말이 되었고 얼룩말이 된 것이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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