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삭둥이 한명회 1편
■ 칠삭둥이 한명회 1편
한명회(韓明澮)는 개국(開國)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다. 한명회의 자는 자준(子濬), 본관은 청주, 호는 압구정(狎鷗亭)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출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인 여주 이씨다. 한명회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동생 한명진과 함께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가문의 지원을 받아 강원도 자망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학자 유방선의 문하에서 권람, 서거정 등과 함께 공부했다. 한명회와 가장 가까운 친구 권람은 문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었지만 한명회는 낙방을 거듭했다. 이에 주변에서 비웃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마차에 술과 책을 싣고 천하를 떠돌면서 비상(飛上)의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그가 기다리던 때는 오지 않았다. 아주 늦은 나이 38세 때 간신히 문음(門蔭: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직에 오름)으로 개성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잠저(潛邸) 경덕궁의 문지기격인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관리로서는 말단인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 해, 문종이 죽고 12세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올랐다. 당시 정권은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 대신들에게 주어져 있어 신권이 강화되었고, 조정에서 멀어진 왕족들은 크게 불만을 가졌다. 수양대군은 추락하는 왕실 권위에 분개하고 내심 권력의 야욕을 숨기면서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몰래 모았다. 이런 수양대군에게 스스로 접근한 인물 중 한 명이 한명회였다.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추천한 사람은 권람이었다. 수양대군을 만난 첫자리부터 한명회는 노골적으로 수양대군의 야심을 부추기는 이야기를 했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해 보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子房)이로다!”라고 하였다. 자방이란 중국 초한시절 때 유방의 책사(冊使) 장량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장자방(張子房)이 되어 최측근 참모로서 왕권 탈취의 모든 단계를 진두지휘했다. 계유정난을 일사천리로 성공시킨 이후, 한명회는 단숨에 종8품 군기녹사(軍器錄事)에서 종4품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지방 말단 8급 공무원이 갑자기 중앙 요직 4급 서기관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보잘 것 없는 최말단 궁지기였던 한명회의 초고속 출세 행진이 시작되었고, 좋든 나쁘든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기게 된 것이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