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반정 1편
■ 인조반정 1편
우리 역사에는 조선시대에만 두 차례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두 반정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중종반정에서는 중종이 반정 세력에 의해 추대되기만 했다. 반면 인조는 직접 반정 세력을 규합하는가 하면, 반정 당일에는 직접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참여했다.
인조가 반정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동생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광해군에게 처형당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반정의 이유로서는 정당성이 부족하므로 그들이 내세운 반정의 표면적 이유는 유교이념에 반(反)하는 광해군의 실정(失政) 즉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중립외교(中立外交)이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는 인조가 반정에 참여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상(上:인조)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인목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할 뜻을 뒀다. 무인(武人)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과 구굉·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족이었다.』 《인조실록》
이렇게 《인조실록》에서는 인조가 직접 의병을 일으킨 점을 강조했다. 또 신경진, 구굉, 구인후 등 인조의 외가 쪽 인척이 다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조는 반정 당일 친히 병력을 이끌고 장단부사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도 비슷하다.
『이기축이 선봉장이 됐는데, 군사 모이는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에 인조가 몸소 앞으로 마중을 가서 연서역(延曙驛: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에 이르러 서로 만났다. 기축이 말에서 내려 길 왼편에 엎드려서 장단 군사가 온다고 아뢰니, 인조가 자기의 도포를 벗어서 입혀줬다.』
광해군의 아버지이자 인조의 할아버지인 선조는 정식 부인인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후궁 9명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두었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고, 훗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인조반정을 일으킨 능양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원종으로 추대됨)의 장남이다. 즉, 광해군과 능양군은 배다른 삼촌과 조카사이였다. 그런데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만에 사망하자, 인빈 김씨가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4남 신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1592년 갑자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다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그에게 분조를 맡기고 자신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신성군은 고된 피난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1592년 11월 평안도 의주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반면,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를 맡게 된 광해군은 전국을 누비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왕세자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