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백두산정계비 1편
■ 숙종과 백두산정계비 1편
숙종은 한양 도성(都城)과 북한산성 보수 공사를 적극 추진하면서 국방 강화에도 주력했다. 한양 도성은 태조 때 정도전의 주도로 처음 건설된 이래 세종대에 도성을 수축(집·다리·성 등을 보수함)했다. 이후 200여 년간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지지 않았던 한양 도성을 다시 보수한 이가 숙종이다.
당시 수축한 돌은 규격화된 것으로 지금도 한양 도성을 답사하면 태조나 세종 시절 쌓은 돌과 숙종 때 쌓은 돌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 북한산성은 숙종 즉위 초부터 축성(築城)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후 숙종은 어영청, 금위영 등 군영에 축성 사업을 맡겼고, 1712년 무렵 완성됐다. 1712년 6월 9일 북한산성에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行宮)이 완성되고, 1712년 10월 8일에는 북한산성의 성곽과 창고, 문루, 우물 등도 마무리했다.
숙종의 국방 강화 사업은 해안 지역의 돈대(墩臺:평지보다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축성으로 이어졌는데, 강화도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수군 출신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과 담판 지어 이곳이 우리 영토임을 승인받은 것도 숙종 대인 1696년(숙종 22년)이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더욱 적극적인 해군 방위 정책을 수립했다. 국방 강화 사업은 지도 제작으로 이어졌다. 청과 조선의 국경 문제가 쟁점이 될 무렵인 1705년, 이이명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청나라 측 대외비로 분류됐던 국경 지도는 명나라 지도 ‘주승필람(籌勝必覽)’과 청나라 지도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 청나라 지리지 ‘성경지(盛京志)’ 등이 있었다. ‘주승필람’을 구하는 데 성공한 이이명은 곧 산동해방지도를 입수하는 일에 착수했지만 이 일은 쉽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이 지도를 대외 유출 금지 도서 목록에 올려놨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잠시 지도를 빌린 후 수행한 화원(畫員)을 시켜 현지에서 급히 이 지도를 베껴 그리도록 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 이이명은 이 지도와 조선의 ‘서북강해변계도(西北江海邊界圖)’ 등을 참고해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제작해 숙종에게 올렸다. ‘요계관방지도’는 숙종에게 바치는 어람용(御覽用)으로 비단에 그려져 병풍으로 제작됐다. 우리나라 북방 지역과 만주, 만리장성 등 군사 요충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인식됐던 백두산은 ‘백두(白頭)’라는 단어의 뜻처럼 흰색을 써서 강조했다. 청과 조선의 국경 지역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숙종의 의지가 반영된 이 지도는 숙종이 늘 곁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숙종 대에는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청과 영토 분쟁이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백두산을 신성시했는데, 청나라도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르며 건국의 발상지로 여겼다. 양국 백성이 서로의 국경을 침범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자 17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은 조선과 청의 주요 외교 현안이 됐다. 1679년 청나라 사신이 백두산을 측량하고 돌아갔는데, 당시 청나라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백두산을 비롯한 조선 산천에 대한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정에서는 조선 측 지도가 유출된 것으로 판단해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자 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