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백두산정계비 2편
■ 숙종과 백두산정계비 2편
1692년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국경선 조사를 요구했으나 조선 측의 강력한 반발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1697년 숙종은 국방에 해박했던 남구만 등에게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남구만은 두만강 이북이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태조 이성계 선조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음을 주지시키고 이곳을 확실히 확보하는 방안을 세웠다.
같은 시기 청나라는 지리에 익숙한 서양인을 활용해 백두산 일대 지형을 살피면서 영토 분쟁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1711년(숙종 37년) 청과 조선 국민 사이에 서로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 간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1712년 청나라는 예부를 통해 정식 공문을 보내왔다.
“청의 사신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고 봉성에서부터 장백산까지 우리 변경을 조사하려 했으나 길이 험하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토문강을 조사하려 하니 협조를 원한다.”
양국은 여러 차례 실랑이를 거친 끝에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서로 영역을 정하는데 합의했다. 당시 청나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 강희제(康熙帝:1661~1722년)는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청 왕조 발상지였던 만주와 백두산 일대를 성지(聖地)로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관리를 파견했다. 이 지역을 영토로 확정하기 위함이었다. 조선도 함경도 북방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영토 조사를 했고, 마침내 양국이 백두산 마루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서로의 영토 확정을 명문화했다.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로 하며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양측이 합의한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그러나 정계비에 쓰인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19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청의 영토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사건’이다. 서쪽을 압록강으로 정한 것에는 양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동쪽 경계로 설정한 토문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양측은 의견이 달랐다.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한 반면, 조선은 토문강을 만주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것이다.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해석하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가 조선 영토가 된다. 실제로도 이곳에 많은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백두산정계비 사건 이후 조선에서는 북방 지역 주민 거주와 경제 활동을 보장하고 행정구역을 신설하는 등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 같은 노력은 역사적으로 북방 지역뿐 아니라 만주 지역까지도 과거 우리의 세력권이었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역사적 배경 아래 19세기 중엽부터 두만강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역에 이주하고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 간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다른 것이므로 정계비에 쓴 문구대로 압록강과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이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고 말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정계비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간도지역은 영원히 우리 영토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