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평책과 탕평채 1편
■ 탕평책과 탕평채 1편
조선 21대 왕 영조(1694~1776년)는 정조와 더불어 조선 후기 정치,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군주이다. 영조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늘 신분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당쟁의 중심에 있었다.
숙종 후반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이 전개됐던 만큼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장희빈 소생의 이복형인 경종이 소론의 지원에 의해 왕위에 오른 후,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 후원을 받았지만 왕세제(王世弟)의 위치는 살얼음판과 같았다.
경종이 즉위한 후 신임옥사가 발생하고 노론 4인방이 희생되면서 영조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왔다. 한순간 방심하면 차기 후계자에서 ‘역모(逆謀)의 중심’으로 목숨까지 위테로운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종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영조는 1724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당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꼈고, 왕위에 오른 후 취임 일성(一聲)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탕평(蕩平)이다.
탕평은 국정의 기본 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정책을 가리킨다. 사실 탕평에 대한 논의는 영조 이전인 숙종대 후반에도 박세채 등에 의해 제기되었다. 당파 간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면서 해결책으로 탕평론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숙종이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에만 그쳤고, 노론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숙종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정국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대거 내몰고 반대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했다. 그리하여 3번의 환국(換局)이 일어났다. 숙종 말년에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노론 중심의 독주가 계속되었다. 경종 시절에도 소론 온건파인 조문명 등은 왕세제인 영조를 보좌하면서 탕평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경종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탕평책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두 대에 걸쳐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탕평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을 국시(國是)로 내세우고 이를 널리 선언했다. 탕평에 대한 영조의 강한 의지는 1727년(영조 3년) 7월 4일 내린 하교에 잘 나타나 있다.
『아! 모든 신민은 모두 내 가르침을 들으라. 붕당(朋黨)의 폐해가 ‘가례원류(조선 현종 때 유계가 가례에 대한 글을 분류·정리한 책)’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해졌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해 한편의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 한쪽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중략) 이미 반포하고 알렸어도 전만 못하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