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토요일

탕평책과 탕평채 2편

■ 탕평책과 탕평채 2편

■ 탕평책과 탕평채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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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蕩平)은 원래 유교 경전 서경(書經)에서 나온 말이다. 서경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로, 고대 중국 정치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는 주나라 무왕이 당대의 현자(賢者)인 기자(箕子)를 찾아가 세상을 잘 다스릴 방법을 물었다는 얘기가 실려 있다. 무왕의 질문에 기자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치우침이 없으면 나라의 정치가 큰 바다처럼 잔물결 없이 평온하고 고르다는 뜻이다. 여기서 따온 말이 탕평(蕩平) 혹은 탕탕평평(蕩蕩平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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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이란 말은 조선 전기 연산군과 중종 때부터 실록에 나오기 시작해서 당파 싸움이 기승을 부리던 숙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상소문에도 ‘탕평’이란 단어가 자주 쓰였고, 숙종의 아들 영조 대에 이르면 ‘탕평’은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탕평’이란 단어는 영조실록에만 300번 넘게 등장할 정도이다.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강력히 지적한 뒤 “마땅한 인재를 취해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의 마음이 이런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탕평에 적극 호응할 것을 독려했다.

영조(英祖)는 즉위 초부터 탕평(蕩平)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영조의 탕평책은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오늘날 이 탕평비는 성균관대학교 정문 왼편에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정문자리가 옛날 성균관의 입구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1742년에 미래의 관료 양성소인 성균관 앞에 탕평비(蕩平碑)를 세우고, 당파와 관계없이 관리를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 하여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하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을 탕평(蕩平)과 편당(偏黨)에 두면서 ‘탕평’이 공(公)이자 바른 것임을 선언한 영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영조 초반 의욕적으로 추진됐던 탕평책은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몽 등 소론과 남인 급진파 등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으로 위기를 맞았다. 반란의 주도층은 선왕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천명하였다.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노론 중심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은 정치 세력과 일부 백성이 동조하면서 반란군 규모는 커졌다.

반군 지도자 이인좌는 한때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으나 소론 출신 오명항이 이끄는 정부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무신란(戊申亂)은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주도해서 일으켰기에 영조는 반란 토벌 후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조정에서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파악하고, 무신란을 탕평책을 더욱 공고히 추진할 계기로 삼았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