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좌의 난 1편
■ 이인좌의 난 1편
16,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과 상공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농민층의 분화와 신분제 해체가 진행되었다. 정부는 수취(收取)체계 개편 및 운영개선을 논의·시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농민들의 부세(負稅) 저항이 심해지고 유민(流民)이 증가했다.
이러한 피지배층의 저항은 지배세력의 물적·인적 지배기반을 동요시켰다. 지배세력 간에는 갈등이 심화되었고, 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이어졌다. 1720년 왕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영조 4년 1728년, 정치적 기반을 잃은 급진 소론파의 이인좌(李麟佐), 이유익, 심유현 등이 일부 남인세력과 연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난을 일으켰다. 현직관료를 비롯하여 문벌 양반이 난(亂)을 주도했고, 집약농업과 유통경제로 돈을 번 중간계층, 그리고 각 지방의 행정 실무자들인 군관, 향임(鄕任)등이 반란군의 실무를 담당했으며, 소상인, 소작인, 노비 같은 기본계층은 일반 군사로 난(亂)에 적극 참여했다. 이를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고 해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본관은 전주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이다. 본명은 현좌(玄佐)이다. 그의 출생지나 관직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남인이었던 그는 북벌정책을 주도했던 대학자 윤휴의 손녀사위로서 당파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할아버지 이운징이 파직되고 큰할아버지 이의징까지 사사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고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숙종(肅宗) 때 극심했던 서인과 남인의 경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지만, 집권세력인 서인은 또다시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으로 나뉘어 당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경종의 즉위로 소론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한 셈이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世弟聽政)까지 실현하려다가 축출 당했으며, 잇달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은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경종의 급서(急逝) 후 노론이 지지한 연잉군(영조)이 즉위하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김일경파의 박필현·이유익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는 이하·민관효·윤덕유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나만치·조덕규·조상·임서호·정세윤·권서린·이호·민원보·민백효·김홍수·이일좌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과 중군별장 남태징이 가담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