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2일 금요일

이인좌의 난 2편

■ 이인좌의 난 2편

■ 이인좌의 난 2편

세가명족의 후예이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은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정변의 기본전략을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고 경중(京中)에서 이에 내응(內應)하는 외기내응(外起內應)으로 정했다.

무신난(戊申亂)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반란 중 가장 다양한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또 유일하게 전국조직망을 가졌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신난 봉기의 명분(名分)은 경종의 복수와 왕통의 정통성 회복이었다. 경종의 시신을 직접 확인했던 경종 비(妃)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동생 심유현(沈維賢)이 봉기에 참여하여, 경종이 영조가 보낸 게장과 감을 먹고 독살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더 강화시켰다.

이들은 경종 독살설을 퍼뜨리며 반란 세력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규합했으며,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는 독살설과 관련된 흉서나 괘서가 나돌았다.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격문도 붙었다. 반란군은 충청, 호남, 영남, 경기, 평안도 등 전국에 걸쳐 조직됐고, 노비나 화적은 물론 양반들까지 가세했다. 목표는 영조 제거와 노론 타도, 그리고 소론과 남인의 연합 정권 구축이었다.

반란계획이 예상보다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 영조는 즉시 성문을 폐쇄한 다음 도성 밖의 관군들을 동원해 수도 방비를 강화했다. 영의정 이광좌는 평안 감사 이사성과 금군별장 남태징을 체포함으로써 평안도와 서울의 내응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애초의 계획이 뒤틀리자 이인좌는 이튿날인 3월 15일 급거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인좌 휘하의 군사들은 진중(陣中)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했으며, 이로써 반군은 정당성과 명분을 얻으려 하였다. 청주에 살고 있었던 이인좌는 양성의 권서봉, 용인의 박완원, 안성의 정계윤, 괴산의 이상택 등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1728년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기로 하였다.

이인좌는 정행민·이계윤 등과 함께 장례 행렬로 위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청주성으로 잠입한 다음 야음을 틈타 병영을 공격하여 삽시간에 성을 점령했다. 병영 문은 기생 월례와 비장 양덕부가 내통하여 활짝 열린 상태였다.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었는데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군관 홍림과 함께 대나무 숲으로 피신했지만 생포되어 반란군 장수 이배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숙부인 이홍무도 반란군에 사로잡혔다가 순절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이때 청주영장 남연년 역시 반란군 장수 목함경에게 참살당했다. 이봉상은 본래 형조참판에 어영대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충청병사로 좌천되어 현지에 부임했다가 불과 4개월 만에 변을 당한 것이었다. 실록에는 “당시 적이 이봉상을 끌어내 칼로 위협하자 크게 꾸짖기를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