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좌의 난 3편
■ 이인좌의 난 3편
불시에 청주성을 장악하고 성내에서 다량의 무기를 확보한 이인좌는 권서봉을 청주 목사,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했다. 이어서 주변 고을에 종사관 유급이 작성한 격문을 돌려 병사들을 모집하는 한편 창고를 풀어 백성들에게 관곡을 나누어주었다.
이때 반란군은 군문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한 다음 아침저녁으로 곡배함으로써 자신들의 거사가 선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과시했다. 그처럼 반란군의 기세가 드높자 인근 청안과 진천, 회인 등지의 수령들이 죄다 도망쳤지만 일부 장교들은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해 왔다.
용기백배한 이인좌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안성으로, 부원수 정세윤은 죽산 방면으로 진공하게 했다. 반란군은 청주성에 이어 대구 지역을 휩쓴 다음 한양으로 진군했으나, 안성 싸움에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고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반란은 6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안성의 일전에서 대승을 거둔 관군은 패주하는 적의 뒤를 쫓아 죽산 방면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험준한 장항령의 지세를 보고 매복을 의심한 오명항은 마보군을 출동시켜 산속에 웅크리고 있던 일단의 반란군을 사살했다. 그때 이인좌는 정세윤과 조우한 뒤 반란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들판 한 가운데 진을 친 다음 소를 잡고 술을 마시게 했다.
치열한 산악전을 염려했던 오명항은 쾌재를 부르며 바람을 등지고 맹공격을 가했다. 연이은 패전에 지친 반란군은 우왕좌왕하다가 곧 흩어졌고, 이만빈과 이우석에게 사로집힌 정세윤은 사지가 잘린 뒤 참수되었다. 며칠 동안 죽산부사 행세를 하던 그의 동생 정계윤 역시 도주하다가 참살당했다.
관군들은 적이 물러나자 그 뒤를 쫓으며 잔적들의 소탕에 나섰다. 한데 그 동안의 고생에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자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 때문에 무고한 백성 1000여 명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희생당했다. 이에 민심의 이반을 염려한 오명항은 적을 생포하는 사람에게만 전공을 인정하겠다고 군사들을 다그침으로써 불필요한 살육을 막았다. 아울러 종사관 박문수와 조현명에게 생포된 반란군 병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하게 한 다음 흉악한 사람만 죽이고 나머지는 곤장을 쳐서 방면했다.
건곤일척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인좌는 수하들과 함께 산사로 피했다가 농민 신길만과 승려들에 의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권서봉, 이지경, 목함경, 박상, 곽장 등 반란군의 주력 장수들이 차례차례 생포되었다. 이인좌가 진문 앞에 끌려오자 종사관과 장수들은 그의 살점을 떼어서 죽이는 연살(臠殺)을 행하려 했다. 하지만 오명항은 그들을 제지한 다음 함거에 실어 한양으로 압송했다.
3월 26일 이인좌가 도성에 다다르자 영조는 인정문 앞에서 그를 친국한 다음 능지처참형에 처했으며, 왕으로 추대 받았던 밀풍군(密豊君)은 반역(反逆)의 괴수(魁首)로 압송되었다가 그들의 제의를 수락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혔다가 왕명에 의해 자결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죄목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