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좌의 난 4편
■ 이인좌의 난 4편
이인좌는 반란의 기치를 높이 올린 지 불과 12일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이인좌(34세)의 네 아들 중명(中明)·인명(仁明)·문명(文明)·화명(化明)은 조선왕조실록 영조4년 7월 24일·영조21년 11월 17일 및 승정원일기 영조4년 4월 14일 등에 따르면, 7세~12세인 관계로 함경도에 관노(官奴)로 보내졌다. 이인좌가 20세 쯤에 결혼했다면, 1728년(영조4) 무신년 봉기 당시에 큰아들이 12세가 되었을 터이다.
무신반란의 성패(成敗)를 가른 안성 싸움의 결정적 이유는 비 때문이었다. 안성싸움이 벌어진 시각은 칠흑 같은 밤중이었는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서로를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어둠과 비바람 속에서 반군(叛軍)의 총포(銃砲)가 모조리 젖어버려 아무 쓸모가 없어졌을 때, 관군(官軍)의 조총(鳥銃)에는 비를 막는 장치인 우구(雨具)가 달려 있어 사용에 문제가 없었다.
아마 총 위에 작은 우산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던 것 같다. 즉 관군은 화기 면에서 반군(叛軍)을 압도했던 것이다. 거기다 관군은 반군의 진격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 반군은 정부군이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무신란의 패배원인은 결속력 약화, 경중(京中)세력의 취약성, 지도세력 부재와 이중거사계획의 판단착오, 주도층의 오판, 분열탈퇴 등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이인좌의 난이 성공했다면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이인좌가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과 호남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호남에서는 박필현이 동조하여 봉기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처형됨으로써 삼남(三南)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당시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데 대한 의심이 백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인좌의 난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인좌의 난은 비록 실패했으나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그 세력이 이어졌다.
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대구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의 고향으로 지칭했고, 50여년에 걸쳐서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낙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금지는 사실상 130여년 후 대원군의 과거 혁파 때까지 계속되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