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1편

■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1편

■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1편

정도전은 이성계를 설득하여 위화도회군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뒤, 중국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의 군사 전략을 일러 준 장량을 자처했다. 이때부터 조선왕조라는 새 나라를 열고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거의 모든 정책과 조선건국의 기반은 정도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정도전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토지개혁이다. 고려의 기득권층인 권문세가를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환호를 살 수 있는 최우선 정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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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토지개혁은 아무때나 할 수 없다. 기득권층이 강할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혁명적인 상황인 새로운 나라가 건국 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공민왕 시절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토지개혁을 추구하다 고려 권문세가 기득권층에 의해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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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도전 앞에 조준이 나타난다. 조준은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경험한 신진사대부였다. 그 역시 유배생활 동안 백성들의 삶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권문세족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도 몸소 체험했다. 정도전이 유배생활을 통해 역성혁명을 꿈꿨다면, 조준은 유배생활을 통해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고려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신진사대부가 힘을 가진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조준은 과감한 토지개혁을 건의했다. 그런데 조준이 건의한 토지개혁의 내용이 지나칠 정도로 과격했다. 조준이 제시한 토지제도의 내용은 사전(私田)의 혁파와 토지의 균등 분배였다. 쉽게 말하자면 땅의 사유재산제를 없애고 모든 백성들에게 땅을 주어 가난한 사람이 없게 만드는,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공산주의식 토지개혁이었다. 이런 과격한 토지개혁 안에 당연히 반대가 빗발쳤다.

정몽주, 권근, 이숭인, 하륜 그리고 모든 신진사대부의 스승인 이색까지도 토지개혁에 강력히 반대했다. 정도전, 조준 등 토지개혁파를 급진파 사대부라고 한다면, 이들에 비해 반대파는 온건파 사대부로 불리우게 된다. 이 일로 정도전은 자신의 스승인 이색과도 갈라서게 되었고, 결국 이색,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파 사대부의 극심한 반대로 조준이 제시한 토지개혁은 좌절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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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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