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1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1편
경종 이윤(李昀)은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 유명한 장희빈 (장옥정)이다. 이윤(李昀)이 태어났을 당시, 숙종의 나이는 27세였다. 14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의 입장에서는 남인과 서인의 갈등 속에서 확실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매우 시급했으므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윤(李昀)은 태어난 지 겨우 100일 만에 원자(元子)로 책봉되고, 3세에 왕세자(王世子)가 되었다.
이윤(李昀)은 훗날 무수리 최씨(최숙빈)의 아들인 연잉군(延㭁君)이 태어나기 전까지 숙종의 유일한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더구나 경종의 유년시절은 남인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정국은 비교적 경종에게 우호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숙종이 환국(換局)을 통해 신하들을 갈아치우며 왕권을 강화했고, 3번째 환국이던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이윤은 자신을 지지해주던 남인 세력을 대거 잃고 말았다. 게다가 중전이었던 어머니가 희빈으로 강등되는 엄청난 사건도 겪었다.
당시 이윤의 나이는 9세로 어느 정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친모(親母)인 장희빈은 계모(繼母)인 인현왕후를 미워하고 저주했지만, 이윤은 새어머니인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권되면서 이윤은 그녀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친모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자 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윤의 세자 자리는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자 이윤은 31년 동안 세자생활을 하고, 마침내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 20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죄인의 아들인 이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숙종에게 이윤 이외에 왕비 소생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왕비를 3명이나 두었지만, 그 사이에서 아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후궁 장희빈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장자(長子)의 권한은 무시할 수 없었고, 법적으로는 인현왕후가 어머니로 되어 있어서 왕위계승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라 할지라도, 친모가 죄인임이 명백했으므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약 15년간 세자 이윤은 늘 불안한 세자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1701년 어머니 장희빈이 죽고 1720년 왕위에 올랐으니, 힘들고 불안하고 외로운 긴 시간을 세자로 생활 했던 사람이 바로 경종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표현할 수 없었던 경종은 왕이 되고 나서도 왕위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 인현왕후의 죽음 이후, 3번째 왕비가 된 인원왕후는 16세로 경종보다 1살 많았고, 그때 숙종의 나이는 42세였다. 숙종과 인원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선조와 광해군 때처럼 왕비 소생의 아들이 후궁 출신의 세자를 충분히 몰아낼 위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지 인원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경종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이복동생인 연잉군(延㭁君)이었다. 6살 터울의 이복동생 연잉군(延㭁君)은 숙종의 늦둥이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老論)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