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2편
■ 경종과 영조의 엇갈린 운명 2편
숙종 대에 있었던 여러 번의 환국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후 서인들끼리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두고 강경한 입장과 온건한 입장이 나누어졌다. 강경한 입장의 노장층은 노론(老論)으로, 온건한 입장을 편 소장층은 소론(小論)이라 칭하게 되었다.
분파(分派)의 직접적인 시작은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 등이 남인을 강력히 탄압하자, 소장파인 한태동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부터였다. 소론이 남인의 탄압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만약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면 보복이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고, 노장층의 노론이 남인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은 지난 날 일어났던 환국에 대한 뒤끝 있는 복수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종 사후(死後) 조선 조정은 주로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하게 일어났고,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이 가열되면 될수록 정국은 혼미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조선 20대 왕 경종이 즉위하였다. 경종은 재위 4년의 왕으로서 보다는 장희빈의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異腹) 형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재위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당쟁에 치어 줏대 없이 이리 저리 휘둘리는 왕의 이미지가 강하고, 그 시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질 만한 큰 역사적 사건도 없었다.
하지만 일부 역사 전문가들은 경종을 다른 시각에서 평가하기도 한다. 경종의 무능과 유약한 이미지는 노론의 치열한 공세(攻勢) 속에서 경종 스스로 수신(修身)을 추구하는 한편, 왕으로서 힘을 길러 노론에 대해 대대적 반전을 꾀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경종은 즉위 후 1년간은 노론이 하자는 대로 다 해주지만, 1년 후 부터는 소론의 상소에 따라 노론의 우두머리들을 대거 숙청하는 신임사화(辛壬士禍)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경종은 남인이 내세운 장희빈의 아들이었고, 영조는 반대편의 서인 측 인물인 숙빈 최씨의 아들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두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두 사람은 공존(共存)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노론은 남인 출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세자로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노론인 이이명과 숙종의 독대(獨對)가 있었다.
당시에 왕과 신하의 독대(獨對)는 불법이었다. 왕과의 만남은 반드시 사관(史官)을 대동해야 했다. 사관을 대동하지 않은 독대의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여러 가지 설들이 추측되고 있다. 우선 경종을 즉위시키고 영조를 세제(世弟)로 정하는 것까지 합의를 봤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경종이 아직 젊은 왕이므로 앞으로 후사(後嗣)를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경종이 후사가 없으리라는 것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잉군 세제(世弟)만들기’ 설(說)은 영조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