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 1편
■ 행주대첩 1편
200년의 평화 끝에 만난 임진왜란이라는 초유(初有)의 국난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일본이 부산진을 공격하고 북상한 지 한 달여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와 조정은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친 상태였다. 전란 초기 조선 육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이순신의 승전보가 전해지면서 조선 육군도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고, 그 정점에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있었다.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라 불리는 행주대첩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 육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년) 7월 배티이치: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었고, 군사를 모으며 왜적을 물리칠 기회를 기다렸다. 권율에게 첫 승리를 안겨 준 배티이치:梨峙싸움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가 전라도를 침범하기 위해 금산으로 진군하면서 시작되었다.
권율은 적병들이 전주를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과 함께 이치로 군사를 이끌고 가 맞서 싸웠다. 이때 권율이 최전선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전진(戰陣)을 격려하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로써 호남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 의하면, 권율은 이치싸움을 행주대첩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권율은 1537년(중종 32년) 경기도 강화도호부(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명문가 자제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6대조가 여말선초의 유학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권근이고, 아버지는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이다. 광흥창수를 지낸 권항, 호조좌랑 권개, 중추부동지사 권순 등이 그의 친형들이다. 뒤에 한성부로 이사하여 생활했는데,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독립문역 3번 출구와 사직터널 주변 일대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그는 어려서 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성장해서도 화려한 옷이나 유흥에 관심도 없었고 사치스러운 습성도 없었다. 어릴 적 여러 일화들을 들어보면 왠지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6세 때 어머니가 하얀 비단옷을 새로 지어주며 입으라고 하자 입기 싫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의복은 몸만 가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남의 시선을 생각합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아버지 권철은 이 얘기를 듣고 이 아이가 비범(非凡)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