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덕진연못과 서예의 맥
◇ 전주 덕진연못과 서예의 맥
더위에 나는 전주의 덕진 연못 연꽃을 보러 가곤 한다. 연꽃은 눈으로 보는 꽃이라기보다는 코로 그 향을 맡는 데에 초점이 있다. 특이하게도 연꽃은 코를 위한 꽃이다. 더위에 연향을 맡으면 끈적끈적한 짜증이 사라진다. 더위에 먹는 보약향(補藥香)이라고나 할까.
전주 사람들의 추억이 어린 덕진 연못 입구에는 ‘蓮池門(연지문)’이라는 현판 글씨가 눈에 띈다. 강암 송성용의 글씨이다. 강암이 남긴 현판 글씨 중에서 나는 이 글씨를 좋아한다. 입구에서 들어가면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비석도 서 있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전주 토박이들은 ‘불교는 원효에서 시작하여 경허(鏡虛)로 끝났고, 유학은 설총에서 간재로 끝났다’고 말한다.
경허와 간재 모두 전주 사람이다. 구한말, 왜정 초에 간재 제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 전라도에서 광주가 그림이라면 전주는 서예이고 묵향이었다. 강암을 비롯하여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글씨를 썼던 악필(握筆)의 창시자 석전 황욱, 그리고 현재 한글 서예의 고수 여태명이 있다.
실학자 이재 황윤석의 후손이었던 석전 집안은 좌익을 많이 해서 빛을 못 봤다. 강암의 아버지 유재 송기면은 꼿꼿한 유학자였고, 두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성리학은 전주의 간재, 필법과 실학은 김제의 석정 이정직(1841-1910)이었다. 이정직은 칸트와 베이컨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성리학과 칸트를 비교한 ‘칸트철학연구평론’이란 저작을 남겼다. 그리고 서예가였다. 석정의 글씨는 벽하 조주승(1854-1903)과 계보를 같이한다.
조주승 윗대로는 물 흐르는 듯한 서체의 수류체(水流體)를 정립한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기 전에는 창암을 촌사람으로 우습게 봤지만 유배 끝나고 오면서는 창암 묘소에 들러 존경의 염을 담은 비석까지 써주고 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창암 이삼만 위에는 김제 출신 송재 송일중(1632-1717)이 있다. 송일중 글씨가 중국에까지 알려져 청나라 강희제는 ‘철마등공(鐵馬騰空)’이라고 평하였고, 글씨를 잘 썼던 숙종은 ‘송백능한(松柏凌寒)’이라고 칭찬하였다. 구한말 매천 황현은 조주승이 죽자 만사에다가 송재, 창암, 벽하 3인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 서예계에 호남이 있어서 적막하지 않다(論定千秋東筆園 未應寂寞我湖南)’고 술회하였다. 전북지사 사무실에 지필묵을 갖춰놓은 송하진 도지사는 송성용의 막내아들이다. 전국 지자체장 중에서 방명록에 쓰는 글씨는 제일 잘 쓰는 것 같다.
-조선일보 조용헌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