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1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1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1편

단종은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친위 대신들을 잃고 권력을 빼앗겼다. 단종은 권력은 잃었지만 왕위만은 수양대군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친인척들을 유배 보내는 등의 압박으로 결국 어린 단종은 더 이상 왕위에서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1455년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즉위한 수양대군이 조선7대 임금 세조이다.

세조가 등극하면서 단종은 15세의 나이에 상왕(上王)이 된 것이다. 39세의 임금보다 스물네 살이나 어린 상왕의 존재는 비극의 씨앗일 수밖에 없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단종은 하루하루 살얼음 같은 나날을 보냈다. 상왕 단종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안한 것은 세조의 측근들이었다. 단종이 창덕궁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권신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외지로 내쳐야 한다는 상소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세조는 곧 결단을 내렸다.

“전날, 성삼문 등이 말하기를 상왕도 모의에 참여했음을 밝혔지만 그 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들이 그치지 않으니 내 어찌 사사로운 은의로 하늘의 명과 종사의 중함을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거주하게 하라"

6월 22일, 단종은 영월로 떠나야 했다. 단종이 강원도로 유배된 것은 한명회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는 군대의 힘을 빌어 음모를 꾸밀 수 있고, 경상도에는 금성대군과 한남군, 전라도에는 화의군과 영풍군이 유배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단종은 조정에서 내치자는 공론이 극에 달했던 1457년 1월 말 경에 영월로 귀양가 관풍헌객사(客舍)에 적소(謫所:귀양지)가 정해진다. 그곳에서 봄을 보내고 여름이 되어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서인(庶人)으로 전락하여 청령포로 적소가 바뀌고, 마침내 17살의 어린 나이로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실록》에는 단종이 자신의 선택으로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야사(野史)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자, 단종은 스스로 목에 줄을 매고 줄을 창밖으로 빼내 당기게 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나이 열일곱.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영화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생을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다가 이렇게 쓸쓸히 죽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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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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