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2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2편

■ 파란만장 단종의 짧은 생(生) 2편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은 그만큼 단종은 어이없게 죽었고,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나면서 함께 따라가려는 왕비 정순왕후 송씨와 동대문 밖 영도교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고 영월로 떠났다. 평민으로 강등된 정순왕후는 정업원(淨業院)에 들어가 살았다. 정업원은 궁궐에 있던 여인들이 궁궐에서 나오면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여승방으로 불리며 여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현재 정업원은 소실된 상태로 현재 그 터에는 영조의 명으로 ‘정업원구기’ 가 새겨져있어 역사의 현장을 증명하고 있다. 정순왕후는 세조가 보낸 곡식을 받아먹지 않았고, 이에 노한 세조가 정순왕후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벌하겠다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정업원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던 정순왕후가 여인시장(여인만 출입하는 시장)을 지나갈 때면, 이곳에 있던 여인들이 일부러 버리는 채소라고 길옆으로 내던지는 식으로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한다.

정업원에 살던 정순왕후는 매일 동망봉(東望峯)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표지석으로 남아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매일 이곳에 올라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면서, 단종을 그리워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훗날 영조가 이 자리에 동망봉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여 새기게 했다고 전하는데, 아쉽게도 일제시대에 채석장이 되면서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으로만 전하고 있다.

일찍 죽었던 단종에 비해 정순왕후는 천수를 누리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단종과 일찍 사별한 탓에 후사는 없었고, 친정마저 몰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숙종 때 이르러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고, 아내였던 송씨 역시 정순왕후로 복위되고 시호를 받으면서 능으로 격상되었다. 그곳이 바로 남양주 진건읍에 위치한 사릉(思陵)이다. 사릉의 능호는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함께 할 수 없었던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함이 전해진다.

단종의 이러한 죽음에 가장 앞장 선 종친(宗親)은 바로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내 준 양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은 종실(宗室)의 제일 큰 어른으로서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막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양대군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생인 세종의 손자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지지자가 되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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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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