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호란胡亂 1편

■ 호란胡亂 1편

■ 호란(胡亂) 1편

1616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건국한 후금(後金)은 광해군의 중립적 실리외교정책으로 조선과 큰 마찰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1595~1649년)가 즉위하면서 북인(北人) 정권은 무너지고 서인(西人)이 실세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정권은 광해군의 정책 대부분을 파기했고, 외교정책의 전환도 불가피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후금과 외교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반정의 주요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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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표방하고 명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피도라고도 하며 평안북도 철산군에 속한 섬)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고 군사원조까지 하자, 신흥 군사 강국 후금(後金)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이제 오랑캐로 멸시받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후금(後金)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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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8월 태조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洪泰時:청 태종)가 즉위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젊은 시절부터 전공(戰功)을 쌓아 온 청 태종은 조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인물로, 조선 정벌을 자신의 미약한 권력 기반 강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일어났던 이괄의 난은 엉뚱하게도 후금에게 조선을 침공할 구실을 주기도 하였다.

624년 ‘이괄의 난’ 때 선봉장으로 참여했던 한명인의 아들 한윤이 국경을 넘어 후금으로 들어가, 새 임금(인조)이 즉위하여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과 박난영의 가족을 처형했다고 밝혔다. 조선의 내부 분열을 눈치 챈, 조선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홍타이지태종의 전쟁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를 하였으나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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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1월 13일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왕자 아민(阿敏)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유해(劉海)를 선봉장으로 한 3만여 명의 병력은 압록강을 넘었다. 정묘호란의 시작이다. 투항한 강홍립(姜弘立), 박난영 등 조선 장수들과 한윤(韓潤)을 길잡이로 삼은 공격이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은 인조의 외교 실책(失策)이 빚은 혹독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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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은 뒷날 보낸 국서에서 출병 이유로 크게 네 가지를 들었다.

1.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공격했다.

2. 명나라 장군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

3. 여진족과 한조의 도망민이 후금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조선이 방관했다.

4. 누르하치가 사망했을 때 조선에서 조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