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 왕의 부인은 어떻게 불렀을까 1편

동양의 한자 문화권 왕실에서는 일부일처다첩제가 일반적이어서, 왕의 정실부인과 왕의 첩이라고 할 수 있는 후궁 제도가 당연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신라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정실부인이 여러 명이고 후궁도 여러 명인 경우가 있었는데, 두 번째 이후 부인들도 엄연히 정식 부인이므로 후궁보다는 격이 높았다. 조선시대부터 정실부인은 단 한 명, 그 외엔 모두 후궁으로 구분되었다.

고구려나 백제, 가야, 발해의 비(妃)에 대한 시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는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생전(生前)에는 ‘〇〇부인’ 이라고 부르다가 죽으면 왕후로 추존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태후 또는 황후 등의 중국식 칭호가 사용된 흔적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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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려에서는 정실부인은 왕후(王后)로,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의 딸과 결혼했을 때는 출신 지역명을 덧붙여 ‘〇〇궁(宮)부인(양주궁부인)’ 또는 ‘〇〇원(院)부인(광주원부인) 이라 칭하였다.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4명이었다. 그런데 정처인 신혜왕후가 ’하동군부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고, 대부분의 다른 부인들도 ’〇〇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와 같은 명확한 구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시대는 적서 차별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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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상으로나 명예 면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시대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이를 구별짓기 위해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새로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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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려 중기(목종~원종)에 접어들면서부터 원 간섭기 이전까지의 시기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 이름을 따라 ‘〇〇궁주(宮主) ’〇〇전주(殿主)‘ ’〇〇궁비(宮妃)‘ ’〇〇원비(院妃)‘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출신지명을 딴 ’〇〇궁부인‘, ’〇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보통 이 단어는 정비(正妃)와 같은 뜻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고려 시대 때는 왕의 정실부인이 한 명이 아니었고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마저 엄격하지 않았기에, 여러 명의 아내들 중 왕이 제일 처음으로 맞이한 아내를 품계나 서열이 낮더라도 원비(元妃)라고 불렸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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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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