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

한 나라의 국모로 지존의 몸이 되었으나, 결국 자식도 하나 없이 청상과부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비운의 왕후 정순왕후 송씨는 세종 22년(1440년)에 아버지 판돈녕부사 송현수(여산 송씨)와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에 14세의 나이로 15세의 단종과 혼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을 꾸어야 할 이 시간도 잠시,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문종의 고명대신(유지를 받든 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약 2년간 조카 단종 밑에서 영의정으로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허수아비 왕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1455년에 왕에 올랐다.

단종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앉았다가 세조 3년(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폐(幽閉:사람을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함)되자, 더불어 정순왕후 송씨 또한 왕대비가 되었다가 대군부인으로 강등되게 되었다. 단종이 영월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자, 정순왕후 송씨는 슬하에 자녀도 없이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문 청룡사 앞 동망봉(東望峯) 기슭에 초막집을 짓고 그녀를 따르던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단종의 죽음을 듣고는 소복을 입고 조석으로 산봉우리(동망봉) 거북바위에 올라 단종이 있는 동쪽을 향해 구슬프게 통곡했다고 한다. 그 구슬픈 통곡소리에 주위 아낙네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가 식량을 보냈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자줏물을 염색하는 일로 연명하며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참 지조있는 왕후였다. 그 연유로 인해 그 마을 이름이 자줏골이 되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82세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다행히 177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자 함께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도 아마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그 한 많은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살아있음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참고 견디며 남편 단종 몫까지 다 살아내며 천수를 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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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ㅇ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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