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1편

■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1편

■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1편

우리가 배웠던 역사적 상식에서 신돈의 이름 앞에는 항상 ‘요승(妖僧)’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신돈은 노국공주가 죽자 노국공주와 비슷하게 닮은 반야라는 여성을 이용해 시름에 빠진 공민왕을 현혹시키고 정권을 잡았고, 정권을 잡은 신돈은 변태적인 주색잡기와 치부(致富)로 고려 말 혼란을 더욱 더 가중시켜 고려의 운명을 망국의 길로 재촉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게다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세력은 위화도회군 후에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주장했고, 이는 뒷날 정도전과 이성계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워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우다)의 명분 아래 우왕과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추대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지금까지의 신돈에 대한 내용은 사실일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돈은 우리 역사상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개혁을 실천했고, 더 확대 추진하려다가 당시 기득권 세력의 반격에 의해 실패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신돈의 집권 기간은 6년 정도에 불과했다. 신돈의 파격적인 개혁에 하층 백성들의 환호는 있었지만 그 개혁을 받쳐주는 권문세가 세력이나 가문 혹은 학연은 없었다. 신돈의 정치적 지위는 전적으로 공민왕의 비호 아래 얻어진 것이었다. 신돈의 권력은 공민왕의 관심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허물어 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점이 공민왕이 신돈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신돈은 6년 집권 기간 중 최영 등 권문세가 유력자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개혁 시책을 전개하기도 했다. 특히 신돈은 당시 승려 신분이었으나 유학을 교육시키는 성균관을 중건하고 과거제도를 개선하여 성균관 학생들을 중용해 신진 사대부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 이 점이 신돈의 몰락을 재촉하기도 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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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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