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6일 토요일

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1편

■ 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1편

■ 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1편

조선시대 패션은 화려했다. 남성은 수정을 잇댄 갓끈과 옥으로 만든 관자, 귀걸이로 꾸몄다. 여성은 풍성한 가체(加체) 와 현란한 비녀, 노리개로 치장했다. 길고 화려한 갓끈, 높고 풍성한 가체는 요샛말로 ‘패션아이템’이었다. 조선 시대 부녀자들이 성장(盛裝)할 때, 머리 위에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붙여 올리는 딴 머리가 ‘가체(加髢)’이다. 흔히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나 표준어는 ‘다리’이다.

한자로는 체라 하고,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여성 패션의 완성은 ‘가체’였을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머리에 얹고 나갔다. 가체는 머리 모양에 따라 다리를 머리에 붙이거나 위에 얹어 사용하였다. 종류로는 조짐머리, 얹은머리, 새앙머리, 어여머리, 대수, 큰머리, 첩지머리, 족머리 등이 있다.

가체는 양반층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층 부녀자에게도 크게 유행했으며, 좋은 다래로 땋은 머리를 틀어서 얹은 가체를 행사나 명절에 한번 씩 사용하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조선후기 들어서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을 두 채에서 수채 정도는 구입 가능하고, 노비를 수십 명씩 구할수 있는 금액이었다. 현대로 치면 최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녀자의 가체를 통해 그 집안의 경제 사정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여성들은 더 크고 무거운 가발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성종 때는 그 길이가 무려 1척(30.3cm)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머리 사치를 위하여 가산 탕진은 물론, 그 가체의 무게 때문에 시집오는 처녀가 혼례 중에 혼절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나이 어린 신부의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신부가 갑자기 일어나다 머리 무게에 눌려 목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가체를 마련하지 못한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고도 시부모 보는 예를 행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가 주요 행사시에 왕의 가족들이 착용할 가체제작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각종 공출을 통해 강제 수집하는 등 백성의 불만을 초래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신라조》에 신라부인에는 미발(美髮)이 많고 길이가 길다고 하였으며, 《당서(唐書) 신라조》에도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주채(珠綵)로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 또한 《당서 신라조》에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