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 김마리아와 2·8 독립선언서

1919년 2월 17일, 기모노를 입은 두 여성이 일본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의 허리를 감싸는 오비(帶·띠) 속에는 몰래 숨겨 놓은 것이 있었다. 만약 발각된다면 당장 감옥으로 끌려갈 문서, 바로 2·8 독립선언서였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와 차경신(1892~1978)이었다. 김마리아는 도쿄 메지로여자학원, 차경신은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다니던 유학생이었다. 9일 전인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2·8 독립운동의 실상을 국내에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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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일본유학생들은 적국 수도 한복판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의 선언문은 『우리는 자기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해 더운 피를 뿌리자』며 강한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도쿄의 조선인 남자 유학생은 700~800명이었는데 여자 유학생은 50명 정도였다. 2·8 독립선언의 서명자로 나선 유학생 대표 11명 중에서 여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여학생 역시 남학생 못지않은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굳게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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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선 여학생들은, 운동을 주도한 남학생들이 모두 체포된 뒤 이 일을 국내에 알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김마리아가 이 일을 맡았다. 황해도 출신인 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재학 시절 머물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김규식·안창호·이동휘 같은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조국애를 키워나갔다. 도쿄 유학 시절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얇은 미농지에 열 장 넘게 베끼며 치밀하게 국내 잠입 준비를 했다. 그리고 믿을 만한 동지로 정신여학교 후배인 차경신과 동행하기로 했다. 김마리아는 서울과 대구, 광주, 황해도로 분주히 움직이며 2·8 독립선언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 준비 작업을 벌였다. 김마리아가 일본 유학 전 교사로 근무했던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도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이 일어나고, 며칠 뒤 서울에서 체포된 김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당해 평생 뼛속에 고름이 차는 병을 얻었다.

김마리아는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고, 투옥과 상하이 망명, 미국 유학,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안타깝게도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3·1운동은 민족운동 전선에서 남녀의 차이를 처음으로 극복한 사건이었고, 이후 유관순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