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5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5편
화랑도의 무사도가 화랑집단은 물론이고 일반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 보편화됨으로서 화랑도는 군사적인 면에서만 국가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었다. 화랑도조직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서 약한 자를 돕는데 서슴지 않았고, 때로는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해 마을의 야경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화랑도가 크게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다.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계층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부분적으로 기여하였다. 화랑도가 진골귀족 및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공통된 목적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나자 신라의 제1차 목표인 군사적 목표는 일단 완료되었다. 이에 전사단으로서의 화랑도의 존재 의의는 점차 줄어들었다. 화랑도는 문무왕 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하였으나, 통일 후 국가가 안정되고 태평세월이 계속됨에 따라 화랑도 정신은 점차 쇠퇴하였다. 하지만 성덕왕 때 김대문은 화랑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랑세기》를 펴냈다. 이 책에는 200여 명에 이르는 역대 화랑들의 활약이 담겨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김대문이 화랑들의 이야기를 썼고,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나왔다는 기록만 전할 뿐이다.
더욱이,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진 반면 상대적으로 진골귀족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면서, 화랑도는 귀족들의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러다가 신라말기 국가권력의 쇠퇴와 더불어 화랑도는 국가의 권력기구를 지지, 옹호한다는 본래의 성격과는 거리가 먼 청소년단체로 변하였다. 이처럼 점차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함께 존재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랑도의 유풍(遺風)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고려시대 궁중의 연중행사였던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 양가(良家)의 자제를 뽑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한 것 등은 그 한 관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화랑도의 유풍(遺風)마저 사라지게 되고, 오로지 노래나 춤을 즐긴다는 가무조합적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랑을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舞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랑도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로서 고려, 조선을 통하여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애국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