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2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2편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수군의 경우도 유사시 중앙에서 달려온 지휘관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수군은 작전 지역의 해로(海路)에 능통해야 한다. 각 군선을 운용하는 노하우도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수군은 제승방략하에서도 개별 함대·군선 지휘관의 재량권이 많이 주어지고 있었다. 그 덕에 수군은 임진왜란 개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 등 총 13종의 군선을 829척 보유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명확한 규격에 따라 건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이에 1461년(세조 7년) 신숙주는 기존 군선을 개량해 전투와 조운(漕運)을 겸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1465년 개발된 것이 병조선(兵漕船)이다. 이름 그대로 군사작전(兵)과 조운(漕運)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배다. 유사시 전시체제로 재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획기적 방법이었다. 평소 선체 윗면의 상장(上粧·선체 최상층의 갑판)을 철거해 조운선으로 활용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상장을 설치해 군용(軍用)으로 썼다.
1485년(성종16년) 《경국대전》에서 병조선(兵漕船)은 맹선(猛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맹선의 ‘맹(猛)’은 재빠르다는 뜻이다. 여전히 조세 운송과 전투 겸용으로 쓰이고, 크기에 따라 대·중·소맹선으로 구분했다. 대맹선은 군사 80명이 탑승할 수 있었고, 조운선으로 사용할 때 곡물 약 800석(石·144㎏) 정도를 운반할 수 있었다. 맹선은 전투보다는 조운에 더 많이 쓰였으므로, 몸집이 둔하고 기동력도 부족해서 일찍부터 군용으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있었다. 적선보다 느리고 둔했던 것이다. 중종과 명종대의 삼포왜란(三浦倭亂)·사량왜변(蛇梁倭變)·을묘왜변 등을 거치면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전투 임무 수행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명종 이후 왜구도 중국에서 화포를 일부 도입하여 대형 군선을 만들고, 선상에 방패를 설치해 중국과 조선 정규군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왜선의 규모 커지고 화포가 강화되어 조선의 맹선으로는 이들을 격퇴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맹선이 아닌 새로운 전투함이 개발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1555년(명종10년) 조선은 덩치가 크고 화력을 대폭 보강한 전투 전용 선박을 개발했다. 바로 판옥선이다. 점점 대형화되는 왜구의 군선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대표전함으로 대활약을 한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선(戰船)이다. 오늘날 우리는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상징이라 하면 거북선을 떠올리지만, 사실 거북선은 가장 많이 보유했을 때도 7척 내외에 불과했다. 반면 판옥선은 임진왜란 발발 2년차에 그 수가 200여 척에 달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