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4편
■ 조선수군 대표전함 ‘판옥선(板屋船)’ 4편
왜란이 발발한 직후 조선이 보유한 판옥선은 숫자적으로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처음으로 출동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동원된 것이 겨우 28척(그 중 4척은 경상우도의 것)이었고, 2차 출동인 당포해전(唐浦海戰) 때에 전라좌도 23척, 전라우도 25척, 경상우도 3척을 합한 51척, 부산해전 때에 전라 좌우도의 판옥선을 합하여 74척에 불과했다. 1593년(선조 26년) 8월 삼도의 판옥선이 100여 척에 이르고 각기 작은 배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장 척수가 많이 확보된 때에도 180여 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바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은 아주 튼튼하고 크기가 크다는 것인데, 약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그 크기는 종전에 기껏 80명을 정원으로 한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밑넓이)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저판 길이 90척, 일반 판옥선이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
그 이후 판옥선은 전선(戰船)으로 개명되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한산도대첩·행주대첩·진주성대첩이다. 해전으로 범위를 국한하면 이순신장군이 이끈 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빼놓고 임진왜란을 논할 수 없다.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이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덕분이기도 하지만, 군선과 군수지원 시스템이 조선 수군을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육상의 전투도 무기체계·전투 장비가 중요하지만 해전은 더더욱 그렇다. 해군에게 군선은 무기인 동시에 병력이 주둔하는 부대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일본 수군이 운용한 군선과 전술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왜 이순신이 이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주력함은 세키부네(関船)였다.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安宅船)와 고바야부네(小早船) 사이의 중형 전함으로 약 70명이 승선했다. 아타케부네는 ‘집이 달린 배’라는 뜻의 대형 군선이었다. 일본에서 ‘해상의 성’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일본 전국시대 봉건 영주들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실제 전투보다 장수들의 기함으로 쓰였다. 일본 군선과 조선 군선은 구조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였다. 우선 선체를 만드는 목재가 달랐다. 일본 전함들은 가벼운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녹나무, 삼나무를 사용한데다 선체의 구조 자체가 얇아서 내구성이 약했다. 소나무에 비해 덜 단단한 데다 판재가 얇아 배를 제작하기 쉽고, 배가 가벼워져 기동력이 향상된다. 반면 무거운 화포를 다량 실을 수 없고, 조선의 단단한 판옥선과 충돌하면 선체가 쉽게 깨졌다.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 세키부네와 기함으로 쓰인 아타케부네 모두 판옥선에 들이받히면 속수무책이었다. 판옥선은 참나무,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이용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