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그 특사 2편
■ 헤이그 특사 2편
1907년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일행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대한제국의 특사(特使)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만국평화회의는 이미 시작한 지 10일이 지났고,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외교관들은 정식 초청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준 일행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회의장 밖에서 각국의 대표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며 호소문을 전달했다.
그들의 호소는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6월 30일 만국회의 의장인 볼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후에도 헤이그특사들은 치열하게 회의장 장외(場外)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일본이 가만 둘리 만무했다. 당시 회의 참여국 중 최대 인원을 파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있음을 알려 방해공작을 펼쳤다.
강대국의 푸대접을 받던 중에도 이준일행의 장외(場外) 외교(外交)는 회의 기간 중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어, 이위종은 7월 8일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티드의 도움으로 각국 기자단이 참석한 기자클럽에 참석하여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 시간 가량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of Korea)’란 연설을 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국제적 도움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연설은 각국 신문에 기사화되어 한국 실정을 알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서방 언론들은 대한 제국의 사정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본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공식회의에 참석마저 좌절되자 이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을사늑약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근심이 분통으로 변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다.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이준은 배를 갈라 자결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겹쳐 타국 땅에서 병사를 한 것이다. 사실 할복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영웅만들기’ 일화는 그의 순국충절의 빛을 퇴색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런데 왜 배를 갈라 자결했다는 말이 나돌고 그런 이야기가 교과서에까지 나오게 되었을까? 당시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당시 서방 언론에는 그의 자살설이 실렸다. 〈대한매일신보〉는 ‘호외(號外)’에서 외신을 인용해 밀사단의 이준이 분을 못 참아 할복자결하면서 각국 대표 앞에 피를 뿌렸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집필이었던 양기탁이 신채호·베델과 함께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한 허구 기사였다. 〈만국평화회의보〉에서는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