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그 특사 3편
■ 헤이그 특사 3편
7월 16일 그들의 행적을 매일 보고하고 있던 일본은 이런 전문(電文)을 일본으로 보냈다.
『한국인 이준의 얼굴에 난 종기를 절개한 결과 단독(丹毒:세균성 급성전염병)에 걸려 어제 사망. 오늘 아침에 매장.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단독으로 죽었다는 것으로 세상에 알림.』
아직까지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면 자살설의 비중도 크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온 사인(死因)인 ‘단독(丹毒)’은 피부에 난 상처가 곪아 염증이 나는 피부병인데, 단독으로 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환자가 면역성이 떨어진 중환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준은 중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준이 병사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서방 언론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한 협약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에서 온 특사가 자결을 했다고 하면 큰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되므로 일본은 이준 열사를 단순 병사(病死)로 밀어부친 것이 아닐까?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과 이휘종은 이미 계획된 여정인 각국 순방(巡訪) 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를 역설하며 독립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은 궐석(闕席) 재판을 통해 이들에게 각각 사형과 종신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이상설과 이휘종 열사는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후에 이상설은 "힘을 합쳐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백인들 어찌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뒤 유해가 러시아 연해주 스위푼 강에 뿌려지는 바람에 유해마저 고향인 충북 진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이준 열사의 유해 역시 훗날에서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한국의 특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자기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어버렸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