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2편
■ 숙종과 환국(換局) 2편
이순이 성장하여 10세가 되자, 서인의 주축이던 김장생(金長生)의 손자 참의 김만기의 열 살 난 딸과 혼인을 했다. 그녀가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이다.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의 친동생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쓴 김만중(金萬重)이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은 왕비와 세자빈은 무조건 서인(西人) 집안에서 나오기를 바랬다. 오래도록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신료(臣僚)들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까지도 당쟁(黨爭)에 휘말리는 어지러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금수저로 태어난 숙종 이순(李淳)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마도 부드러운 성품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성격도 아주 괴팍해서 어머니 명성왕후조차 숙종의 성질이 감당이 안 된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숙종은 몸에 열이 많아 한겨울에도 손에 부채를 들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의 화증(火證)이 뿌린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로 더욱 깊은 고질이 되어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화열이 위로 올라 비록 한 겨울 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숙종실록 30년 12월 11일》
변덕이 죽 끓듯 했던 숙종 치세 동안 당쟁은 극(極)으로 치달아 수많은 중상모략과 고변(告變)이 판을 치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고 축출과 등용이 되풀이 되는 정치적 격변(激變)을 겪었다. 정권이 바뀌는 환국(換局:시국이 바뀜)이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파당(派黨)의 인물들은 역적으로 몰려 매번 수십 명씩 처형당했고, 어제의 충신은 오늘의 역적이 되었다.
14세의 소년 임금 숙종은 즉위 후 곧 과거 예송 논쟁에서 송시열이 했던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송시열 등 서인(西人)들을 줄줄이 내쳤다. 숙종이 즉위 후 예송(禮訟:예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논쟁 최 중심에 서 있었던 송시열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한 것은 정통성이 있는 왕의 강한 이미지를 대내외에 인식시키기 위한 조처로 파악된다. 이로써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윤휴, 허적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숙종대 초반 정국(政局)을 이끌어간 인물은 공작(工作) 정치의 달인 김석주이다. 서인의 대표적 명문가 출신에 현종과 숙종의 가까운 외척(外戚)이기도 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신 서인 출신이었으나, 송시열이 대동법을 추진한 김석주의 조부(祖父) 김육과 대립하는 바람에 송시열과 관계가 좋지 않아졌다. 김석주는 한직(閑職)에 머무르다가 현종 말년의 2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임에도 자신의 스승인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