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궁後宮 2편
■ 후궁(後宮) 2편
<경국대전>에는 후궁들의 입궁, 승진, 업무 등에 관해서 아무런 규정이 없다. 정원이 몇 명인지, 어떻게 선발한다는 원칙도 없고, 품계만 나뉘어 있을 뿐이다. 그때그때 왕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후궁들은 왕과의 개인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일정한 직무를 맡았다. 왕의 잠자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왕비를 보좌하거나 궁중의 제반 사무를 분장하여, 매우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임무 부과가 이루어졌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후궁들이 얼마나 존재하였을까?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후궁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자료가 없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후궁들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태종은 후궁제의 기초를 닦으면서 왕이 3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 ‘1빈 2잉’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궁을 여럿 두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아들 문종을 위해 권씨·정씨·홍씨 등 3명의 후궁을 동시에 뽑기도 했다. 후궁 수는 왕마다 다르지만 조선 초기에는 대략 7~8명을, 후기에는 평균 3명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즉위한 왕은 27명이지만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추존된 덕종, 원종, 진종, 장조, 익종까지 합치면 모두 32명이다. 32명의 왕의 정실부인의 수는 47명이고, 후궁 수는 166명 정도 된다. 정실부인의 3배가 넘었다. 이 가운데 5명은 나중에 왕비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 케이스로 우리가 잘 아는 장희빈이 있다. 후궁의 수는 고려의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 초기에 더 많았고, 성리학 윤리가 심화되는 후기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전기에는 간택후궁의 수가 승은후궁과 비슷했지만, 점차 간택후궁 수는 줄고 승은후궁이 늘어났다. 실제로 대략 166명 중에 59명이 간택후궁이며, 광해군 이후에는 현격하게 줄어서 전체적으로 승은후궁이 간택후궁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승은후궁이 낳은 왕의 자녀가 왕비나 간택후궁이 낳은 수보다 훨씬 많았다.
후궁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세자가 되면 특별대우를 받아 정1품 빈에 책봉되고, 궁호(宮號)를 하사받았다. 빈으로 책봉된 후궁 가운데 칠궁(七宮)은 왕의 어머니가 된 후궁이다. 즉 원종(인조 아버지), 경종,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영조, 순조, 영친왕의 어머니를 말한다. 왕비가 죽으면 왕과 함께 신위를 종묘에 모셨지만 후궁은 종묘에 모실 수 없어 따로 사당을 설치해 모셨다. 또한 왕비는 죽어서 왕의 곁에 묻힐 수 있었지만 후궁은 같이 묻힐 수 없었다. 왕과 왕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한 데 비해 후궁의 무덤은 원(院)이라 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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