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궁後宮 3편
■ 후궁(後宮) 3편
조선의 왕 가운데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19명을 둔 태종이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14명, 성종이 13명, 고종이 12명, 연산군과 중종은 11명, 정종은 8명의 후궁을 두었다. 후궁을 두지 않은 왕도 있었으니 현종, 경종, 순종이며, 순조는 한 명을 두었다.
조선시대 즉위한 27명의 임금이 맞이한 부인은 모두 37명이다. 성종, 중종, 숙종은 3명씩이고, 태조, 예종, 선조, 인조, 경종, 영조, 헌종은 2명씩이며, 나머지 17명의 왕은 한 명씩을 두었다. 후궁 중에서 왕비의 지위를 얻은 여성은 6명이다. 왕비의 신분을 최초로 획득한 후궁은 문종의 세자 시절 첩이었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이다. 이후 두 번째 후궁은 예종의 둘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다. 연산군의 어머니의 폐비 윤씨도 후궁 출신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두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 윤씨도 후궁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양반 출신의 간택후궁이었다. 승은후궁으로 왕비에 오른 경우는 희빈 장씨밖에 없다. 장희빈이 죽임을 당한 이후에는 숙종이 ‘후궁으로는 왕비를 삼지 말라’고 명함에 따라 후궁으로 왕비가 된 여성은 없었다.
세조의 후궁 소용 박씨 덕중은 수양대군 시절 애첩이었다가 세조 즉위 이후 소용에 봉해졌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후 환관 송중을 사랑하여 처벌을 받았고, 또 종친인 구성군 준을 연모하여 편지를 보낸 일이 문제가 되어 교형까지 당하였다. 정종의 시비(侍婢) 기매도 영안대군 시절에 아들을 낳았으나 환관 정사징과 간통하여 궐 밖으로 쫓겨났다.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참소하여 죽게 했다 하여 연산군이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으로 하여금 때려죽이게 하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연산군은 내수사를 시켜 그들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리게 하였다.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를 모략하여 죽게 하는 데 일조했다 하여 정조에 의해 작위를 박탈당하고 궁에서 폐출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후궁들은 자신이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궐을 나와 별궁에 모여 살았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이 죽은 뒤 그의 후궁들을 의빈궁에 모여 살게 했다. 세종이 죽자 그의 후궁들을 자수궁에 거처하게 하였고, 문종이 죽자 그의 후궁들은 수성궁에 모여 살게 하였다. 이후 후궁들은 주로 자수궁에 거처하였으나, 성종은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박팽년의 딸)가 거처하는 곳을 창수궁이라 하여 특별히 구분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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