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토요일

궁형宮刑과 사마천 2편

■ 궁형宮刑과 사마천 2편

■ 궁형(宮刑)과 사마천 2편

분노한 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물었다, "태사령, 너는 어찌 한 마디도 하지 않느냐? 너는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황제가 묻자, 사마천은 즉시 무릎을 꿇고 직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릉은 다시 얻기 힘든 국사(國士)로 매우 우수한 인재입니다. 설사 이릉이 투항했다 하더라도, 이전의 공로를 감안하여 그를 처벌해서는 안됩니다” 고 하였다. 또 이어, “이릉은 5천 보병을 이끌고 8만 흉노족과 8일 밤낮을 격전을 벌였습니다. 비록 패배하고 투항했지만 그는 한나라의 위상을 높였으니, 공(功)으로 과실(過失)을 상계(相計)해야 합니다. 그가 이번에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이 택한 \거짓투항\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목숨을 남겨두어 그가 적의 내부에서 공을 세워 죄를 갚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 아뢰었다.

사마천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분노가 극에 달한 한 무제는 즉시 명을 내렸다. “이릉의 배반행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사마천은 반적(叛賊)의 편을 들고 있으니 즉시 감옥에 집어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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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을 변호하면서 한 무제를 달래려 했던 사마천은 감옥에 갇혀 목이 잘릴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마천은 ‘무상(誣上)’ 즉 황제를 모함했다‘ 는 죄명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고대 형벌에서는 사형을 받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돈을 내서 속죄(贖罪)하거나 스스로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었다. 돈이 없고 죽기도 싫으면 궁형을 받고 태감(환관)이 되어 영원히 황제를 위해서 복무하면 되는 것이다. 궁형은 죽지는 않지만 고통이 커서, 죽기보다 더 싫은 형벌로 알려져 있다. 또, 남자가 궁형을 당하면 목소리가 여자처럼 바뀌고 수염이 사라지고 겉모습이 노파로 변한다는 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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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감(환관)이 되면 죽음은 면할 수 있지만, 남자로서 치욕스러운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돈으로 사형을 면하려면 50만전을 내야 했으니, 사마천은 그렇게 많은 돈을 낼 수가 없었다. 돈도 없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영원히 역사에 남는 불후(不朽)의 역사책‘ 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마천은 스스로 치욕스러운 궁형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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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사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니며, 남자도 아닌 새로 태어난 사마천은 사회 최하층의 신분이 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보고 정치를 보고 역사를 보게 되었다. 궁형을 받기 전에 사마천은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던 사람이었다. 호의호식하는 인물이 하층민의 삶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궁형을 받고 사대부에서 제명되고 태감이 된 사마천은 더 이상 좁은 시각이 아니라 더 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보게 되었다. 그는 편견을 버리고 폭넓은 식견(識見)으로 『사기』를 매우 독특한 기술(記述)방식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고(千古)의 명저(名著) 『사기』를 세상에 남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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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궁형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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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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