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토요일

청빈의 아이콘 최영崔瑩 1편

■ 청빈의 아이콘 최영崔瑩 1편

■ 청빈의 아이콘 최영(崔瑩)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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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은 고려 말(末)을 대표하는 무인(武人)이자 명장(名將)인 최영(崔瑩)이 한 말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터이지만, 사실은 최영의 부친 최원직이 유언으로 남긴 말이다. 부귀영화를 쫓지 말고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최영(崔瑩)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울 때 마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전답(田畓)을 그때마다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좁고 누추한 집에서 끼니를 끓일 쌀이 없을 정도로 아주 청빈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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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은 충숙왕 3년(1316) 종6품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커가면서 힘이 장사였고 체구도 아주 우람하였다. 사람들은 최영(崔瑩)을 용의 얼굴에 봉의 눈, 범의 걸음걸이를 가졌다고 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본토에서 일어나 원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고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통고하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로 점거하고 설치한 쌍성총관부가 있던 곳이며, 공민왕 때 최영이 출정해 회복한 곳이었다. 최영은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자, 우왕에게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백년 만에 겨우 회복한 영토를 순순히 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무장 최영의 생각이었다. 우왕 역시 최영의 생각에 동조해 전국의 군사를 모집하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최영을 자신의 확실한 측근으로 만들었다. 최영은 처음에 자신의 딸이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우왕의 뜻이 확고해 결국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최영은 더욱 굳건하게 고려 왕실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1388년(우왕 14) 5월, 마침내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우왕과 함께 요동 공략에 나섰다. 이때 최영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명장의 이름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했다. 하지만 최영과 우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총사령관에 최영, 좌군도통사에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해 출정을 명했다. 여기에서 최영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총사령관인 자신이 개경에 남은 채 고려의 모든 군사를 요동정벌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힌 이성계에게 내어 준 것이다. 설마 쿠데타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절대 절명의 생사를 건 이성계의 도박 위화도회군이 단행되었다. 이때 최영 휘하에 남은 군사는 불과 50여 명밖에 없었다. 개경에서 다시 군사를 모아 이성계군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붙잡혀 고봉현으로 귀양갔다가 두 달 후 처형당하고 말았다. 참수되어 목은 효수되고 시체는 길가에 버려지고 말았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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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이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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