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빈의 아이콘 최영崔瑩 2편
■ 청빈의 아이콘 최영(崔瑩) 2편
고려 개국 공신 후손인 최영에게 고려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영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고려를 지키고 싶었고, 주색잡기에 빠져 군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심지어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우왕의 후견인을 자청하였다. 자신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우왕은 고려의 군주였기 때문이다.
나라의 땅을 넓혀 위대한 고려를 이룩하려던 노장(老將)은 73세룰 일기로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최영은 죽음을 당하기 직전 사람들에게 “내가 평생에 물욕을 가진 적이 있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풀 한포기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무덤에는 한 포기의 풀도 나지 않고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붉은 무덤赤墳이라 하였다. 그 뒤 600여 년 동안 풀이 나지 않던 무덤은 1976년부터 풀이 무성하게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타고난 용맹과 지략을 앞세워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한 최영의 기개와 충심은 수많은 고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고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높은 관직까지 올랐음에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충심은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뭇 사람들의 큰 귀감이 되었다.
무인으로서는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지킨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나 정치인으로서는 적잖은 실책을 남긴 최영. 하지만 최영이 행한 실수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한 최영의 청빈한 삶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적과 대치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했던 최영. 요동 정벌의 실패로 몰락했으나 오로지 고려를 위해 무장의 도리를 다한 그는 확실히 고려 최후의 명장이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향이 최영을 비운의 인물로 남기긴 했지만, 수많은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솔선수범 앞장서서 나라를 지킨 최영. 사사로운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오직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청렴한 관료. 최영은 평생 재물과 여색을 멀리한 청백리였다. 우리는 지금 최영과 같은 정치인이 그립다.
후일 조선시대 변계량이 최영의 충정을 기리는 시를 지어 후세 사람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할 때 백발이 성성하구나.
말을 배우는 거리의 아동도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고,
한 조각 붉은 마음 영원히 죽지 않아,
그 이름은 천추만세 태산과 같이 길이 남으리.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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