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독립운동가 2편
■ 여성독립운동가 2편
1930년 중국 상해. 25살의 한 아가씨가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화림. 14살에 3·1운동을 했고, 22살에 학생운동을 했던 이화림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왔다. 그리고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여기에서 윤봉길을 만나게 된다. 이화림은 윤봉길의 암살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윤봉길과 함께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가 열리는 홍코우공원을 여러 번 답사했고, 사건 당일에도 암살 현장에서 윤봉길을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 또 이화림은 1938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대 부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독립운동을 했던 무장부대인데, 1942년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을 때, 이화림은 전투에 참여하며 선전활동과 남성대원들의 식사 준비까지 도맡아했다. 거칠고 숨 막히는 전투와 암살 현장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청춘을 바친 여인이다.
영화 ‘암살’의 실제 모델이기도한 남자현은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하고 무장 항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남자현은 중국으로 가 ‘서로군정서’라는 독립군 단체에 가입하여, 그곳에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면서 아들을 무관학교로 보내 독립군으로 키운다. 그러던 1926년 어느 날, 조선 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남자현은 사이토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남자현보다 먼저 사이토의 목숨을 노린 송학선이 사이토가 탄 자동차에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는데, 아쉽게도 그가 찌른 건 사이토가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경호가 강해지자 남자현 일행은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로부터 7년 뒤, 남자현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자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이 중국 장춘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남자현의 나이 61세. 남자현은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가 되었다.”며 암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남자현은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기고 노부요시에게 가던 중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조선인 스파이가 경찰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다. 경찰에게 붙잡혔을 당시 남자현은 의병 활동을 하다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한다. 남자현은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 남자현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쟁사에서 30년 동안 무장 투쟁을 벌인 유일한 여성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 나라를 사랑했던 남자현의 숭고한 정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919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병원. 3·1운동에 참가했던 조선인들이 일본 경찰의 총과 칼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 왔다. 조선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큰 충격에 빠진 간호사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박자혜. 그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박자혜는 그날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하는 조선인 간호사들과 함께 간호사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쇄물을 만들고, 조선인 의사들과 힘을 합해 일본인은 진료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