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2편
■ 영조와 사도세자 2편
세자는 8세 때 동갑내기인 홍봉한의 딸과 혼인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한중록》으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이다.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까지는 두각을 별로 나타내지 못했다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된 뒤 영의정에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다. 세자는 혜경궁 홍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첫아들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대표적 현군(賢君)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된다.
뭘 해도 마냥 귀여운 어린 시절은 가고, 세자에게도 본격적인 세자수업이 시작되었다. 대략 10세 정도 되던 때부터 세자를 향한 영조의 각별한 사랑은 식기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체격도 크고 힘도 셌던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를 더 좋아했고, 그나마 공부도 영조가 강조하는 경전(經典)보다는 잡학(雜學) 쪽에 관심이 많았다. 영조는 이런 세자의 모습에 조금씩 실망을 하면서 세자를 질책하는 경우가 많아져 갔다. 학문에 열중하지 않는 세자를 탐탁치않아 하던 영조는 어린 세자에게 엄격한 지침을 하달했다.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연강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하루에 쓰기 시작해 그믐까지, 어느 날에 소대하고 어느 날에 차대했으며, 어느 날에 서연하고 어느 날에 공사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영조는 사도세자를 수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국정(國政)을 익히게 했고, 1744년 9월에는 친히 권학문(勸學文)을 지어서 설명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도세자는 학문하는 것을 싫어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세자는 부왕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해서,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했던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또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 타기 같은 놀이에만 열중해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세자를 따뜻하게 타이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꾸중하거나 흉을 보는 등 미워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아들 세자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고 어릴 적부터 아들을 매우 엄하게 다루었고, 사도세자는 그 스트레스 때문에 폭력성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영조가 나이가 들자 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지시했다.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