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1편
■ 영조와 사도세자 1편
조선시대 왕실에서 벌어졌던 최대의 비극을 말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바로 영조에 의한 사도세자의 죽음일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이 비극적인 사건은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불린다.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같은 정책을 통해 백성들을 위한 서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도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던 국왕이 자신의 친아들에게는 왜 그토록 잔인하고 비정했던 것일까?
제 2의 태평성대를 이룬 영조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왕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82세), 가장 오래 재위한(52년) 영조는 정성왕후, 정순왕후 등 왕비 2명과 후궁 4명을 두었는데,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 영조의 첫 번째 아들(효장세자)는 병으로 10살에 죽고, 40이 되어서야 겨우 둘째 아들을 보았다.
1735년 1월 21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영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하나뿐인 아들 이선(李愃), 그가 바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영조는 41세, 영빈 이씨는 당시로서는 노산(老産)인 39세였다. 영빈 이씨 또한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와 마찬가지로 천한 나인 출신이었다.
영조는 즉시 둘째 아들을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두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선은 조선 왕조 사상 최연소 원자이고 최연소 세자가 되었다. 영조가 세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서는 여러 설(說)이 분분하다. 당쟁의 희생양이라거나 사도세자가 더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쳐서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물론 대신들도 매우 기대가 컸다. 그 종말은 참혹했지만, 처음에 영조와 이선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왕자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임금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영조의 기쁨가 기대는 그만큼 더 커졌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다고 한다. 얼마 후에는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가지려고 했고, 영조가 기뻐하며 세자가 쓴 것을 입시(入侍)한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어린 시절 세자의 영민함을 나타내는 기록은 많이 있다.
세자가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린 시절 세자의 영특함은 부왕(父王)과 왕실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