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소한 왕, 영조
■ 검소한 왕, 영조
영조는 검소함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백성들과 어울리며 소박한 생활을 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까지 검소함을 잃지 않으려고 항상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사치와 낭비를 싫어했다. 영조는 나서부터 궁궐에서 자라며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가 왕이 된 임금들과는 다른 환경과 형편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엄격한 과정을 거친 궁녀 출신이 아니라 무수리 신분인 데다가 소론과 노론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론 세력이었던 후궁인 영빈 김씨의 양자처럼 키워졌다. 한마디로 어렵고 힘든 세월을 겪어내야 했던 것이다.
궁궐 밖에서 백성과 어울려 살며 백성의 고달픈 생활을 알았고, 반대로 백성의 생활은 곤란한데 사치를 일삼는 양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백성의 형편을 헤아리는 마음에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고, 이를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들도 따르게 하여 나라의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그는 궁중에서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무늬를 넣은 비단옷, 금실옷, 화려한 부채, 가죽신, 긴 담뱃대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도 제한했다. 또한 여인들이 머리 위에 큰 머리를 얹어 머리 모양을 높게 꾸미고 비단과 보석으로 장식한 가체를 금지시켰다.
가체는 값이 매우 비싸 집 한 값을 웃돌았기 때문에 영조는 가체 대신 머리를 뒤로 쪽져 비녀를 꼽도록 했다. 궁궐의 방문 종이가 뚫어지면 손수 종잇조각을 잘라 발랐고, 버선도 해진 데를 기워서 신었다고 한다. 비단으로 만든 요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하며 명주로 만든 이불과 요를 썼다고도 한다.
영조 자신도 새 옷이나 비단 옷 보다는 백성들이 입는 무명옷을 좋아했고, 입던 옷을 빨아서 입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당부하기 위해서 몸소 상의원(尙衣院)에서 매년 옷감 짜는 것을 그만두라 하고 베틀도 철거하였다. 상의원은 조선에서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 쓰이는 일용품의 공급을 맡은 관청이고, 베틀은 옷감에 무늬를 넣는 것이었다.
수라상도 5번에서 3번으로 줄였다. 조선시대 왕은 아침 6시에 죽이나 미음으로 초조반, 오전 10시에 밥, 국, 김치, 전골 등 기본 음식에 12가지 반찬이 오른 아침 수라, 12시쯤 점심에는 면이나 떡국 등으로 차린 낮것상, 저녁 6시쯤에 12가지 반찬이 오른 저녁 수라, 오후 3시나 밤 9시쯤에 약식 등의 참까지 보통 하루에 5~6끼를 먹었다. 그런데 영조 임금은 참이나 낮것상을 줄여 하루 3끼만 먹었다고 한다. 여기에 반찬 수도 줄이라고 했다. 또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영조는 술이 곡식만 낭비하고 건강을 해치며 일을 게을리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영조의 금주령(禁酒令)은 매우 엄격하여 민가뿐만 아니라 국가의 제사에도 술을 쓰지 못하게 하고 차를 쓰도록 했다. 금주령은 영조의 재위기간 내내 유지되었으나 사람들의 술 사랑은 막지 못했다. 실록을 살펴보면, 금주령을 어긴 사례가 종종 나온다. 영조 38년(1762년)에 종2품 남도 병마절도사 윤구연이 금주령을 어기자 사형을 내렸고, 이를 반대하는 재상급 대신들을 모두 파직시켰다고 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