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했다. 본래 조선왕실에서는 차기 왕위를 이을 세자가 부재할 경우 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한 채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소현세자의 아내)를 사사(賜死)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행동은 훗날 예송(禮訟)논쟁의 씨앗을 심어놓게 된다.

후사도 없이 온갖 박대를 받으며 외롭게 지내는 계모 장렬왕후를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은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이지만 진심으로 공경하였다. 문안을 드리지 말라는 부왕 인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은 계속 장렬왕후를 찾아가서 문후를 드리며 정성껏 효도했다. 그때마다 장렬왕후는 몹시 고마워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 조소용이 장렬왕후가 인조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게 하자, 봉림대군은 조소용을 쫓아내고 장렬왕후를 모셔 오도록 했다. 1649년(인조27년) 5월 8일 인조는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효종의 효성으로 대비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거의 궁중의 안방마님을 차지하던 소용 조씨가 몰락한 것은 장렬왕후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장렬왕후가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소용 조씨가 며느리인 신씨(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내)를 박대하고 여종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자, 신씨는 장렬왕후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가 저지른 모든 짓들을 자복해버린 것이다. 1651년(효종2년) 소용 조씨는 자신이 낳은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게 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사위의 아버지 김자점 등은 역모혐의로 사사되었고, 숭선군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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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극진한 효성 덕분에 장렬대비는 궁궐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족보상으로 증손자(인조의 증손자)가 되는 숙종 이순이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 후,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 조씨는 한 궁녀를 총애하여 자신의 처소로 들였는데, 이 궁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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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행동이 매우 방자하고 남인 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대비 김씨명성왕후:현종 비는 곱게 보지 않았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담대해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왕후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 장씨를 가차없이 내쫓아버렸다. 요즘 세상에서도 며느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닌데, 지금보다 훨씬 더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궁녀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죽은 뒤에는 비로소 왕실의 큰 어른(대왕대비)으로서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하여 내명부를 통솔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