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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화요일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했다. 본래 조선왕실에서는 차기 왕위를 이을 세자가 부재할 경우 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한 채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소현세자의 아내)를 사사(賜死)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행동은 훗날 예송(禮訟)논쟁의 씨앗을 심어놓게 된다.

후사도 없이 온갖 박대를 받으며 외롭게 지내는 계모 장렬왕후를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은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이지만 진심으로 공경하였다. 문안을 드리지 말라는 부왕 인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은 계속 장렬왕후를 찾아가서 문후를 드리며 정성껏 효도했다. 그때마다 장렬왕후는 몹시 고마워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 조소용이 장렬왕후가 인조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게 하자, 봉림대군은 조소용을 쫓아내고 장렬왕후를 모셔 오도록 했다. 1649년(인조27년) 5월 8일 인조는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효종의 효성으로 대비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거의 궁중의 안방마님을 차지하던 소용 조씨가 몰락한 것은 장렬왕후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장렬왕후가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소용 조씨가 며느리인 신씨(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내)를 박대하고 여종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자, 신씨는 장렬왕후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가 저지른 모든 짓들을 자복해버린 것이다. 1651년(효종2년) 소용 조씨는 자신이 낳은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게 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사위의 아버지 김자점 등은 역모혐의로 사사되었고, 숭선군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

효종의 극진한 효성 덕분에 장렬대비는 궁궐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족보상으로 증손자(인조의 증손자)가 되는 숙종 이순이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 후,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 조씨는 한 궁녀를 총애하여 자신의 처소로 들였는데, 이 궁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이다.

",

장씨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행동이 매우 방자하고 남인 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대비 김씨명성왕후:현종 비는 곱게 보지 않았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담대해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왕후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 장씨를 가차없이 내쫓아버렸다. 요즘 세상에서도 며느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닌데, 지금보다 훨씬 더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궁녀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죽은 뒤에는 비로소 왕실의 큰 어른(대왕대비)으로서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하여 내명부를 통솔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장렬왕후 조씨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셋째 딸로, 조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집안이었다. 인조의 원비(元妃) 인렬왕후 한씨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나자, 3년 뒤 인조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嘉禮)를 올려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조는 44살이니 무려 29살 차이가 난다.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더 어렸고, 손자인 현종과도 겨우 16살 차이였다. 하지만 가례를 올린 첫 날을 제외하고 인조는 장렬왕후를 찾지 않았다.

인조와 장렬왕후 조씨 간의 나이 차이가 많고, 인조는 당시 소용 조씨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20세의 나이에 풍병(風病)까지 오는 등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또한 중전이 머물러야 할 전각(殿閣)을 소용 조씨에게 내주고, 1645년 경덕궁으로 옮기는 등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인조가 새 중전을 뽑을 때, 아버지 조창원은 딸에게 "무조건 밉보여 왕비 후보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했으나, 장렬왕후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본인 스스로 왕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김상궁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 결국 왕비로 간택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으며,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숙종 14년(1688) 사망했는데, 인조·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렬왕후는 국모(國母)가 되기는 했지만 15살 밖에 안 된 어린나이라 내명부를 다스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인조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한 장렬왕후에게 가장 큰 장애는 인조의 무한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소용 조씨였다. 소용 조씨는 숭선군을 낳고 반정 공신 김자점의 세력을 등에 업으면서 마치 중전처럼 행세할 정도로 권세가 대단했다.

조 소용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비 조씨는 소용 조씨에게 눌려 죽은 듯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장렬왕후 조씨는 아이를 못 낳는 열등감으로 움추려 들었고, 인조가 장렬왕후 조씨의 침소에 들르려고 해도 조소용이 늘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했다. 그러나 장렬왕후 조씨는 비록 나이는 어려도 후궁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넓은 아량을 보여 덕망 높은 중전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647년(인조25년) 5월 조소용의 농간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그 중 석철과 석린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인조도 손자들의 죽음이 누구의 농간인지 알면서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어린 왕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는 오직 왕비 조씨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인렬왕후가 죽은 1년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45)와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1619-59) 내외가 청(淸)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한씨가 살아 있었을 때는 궁궐 내명부들의 위계질서가 바로 섰지만, 그녀가 죽자 그 위계질서는 깨지고 말았다. 물론 3년 후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들어왔지만 15살의 장렬왕후는 세자보다도 더 어려 권위가 견고하지 못했고, 내명부를 다스릴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부터 줄곧 병치레를 하던 소현세자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동안 청나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인조와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탐탁찮게 여긴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계비(繼妃)인 장렬왕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수렴청정을 해 줄만큼의 역량이 있는 왕실 어른 인렬왕후가 살아있었다면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세등등한 후궁들이 급기야 세자빈 강씨까지 모함하기에 이르렀고, 인조는 마침내 아들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비정한 부왕이 되고 말았다. 평생 남편에게 매사 조심할 것을 권하며 내조하던 한씨가 10년만 오래 살았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인렬왕후의 능호(陵號)는 장릉(長陵)이다. 인조는 인렬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내 쌍릉이 되었다. 능 자리를 정하는 과정에서 장릉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인조가 유명(遺命)을 내린 것이었기에 효종은 인렬왕후 옆에 장사지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그대로 실현되었다.

세월이 흘러 능침에 여러 번 탈이 나자 숙종 연간에 들어서 풍수가 좋지 못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숙종에게 천릉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장릉의 천릉(遷陵)은 실현되지 못했다.

영조는 등극한 후, 숙종 연간에 장릉을 천릉하려는 논의가 있었음을 처음 듣게 되었다. 이곳에 뱀이 종종 출몰한다고 하면서 장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에도 뱀을 보았으나 총호사 김자점이 숨기고 그대로 봉한 사실과 장릉의 지리가 나빠 뱀이 출몰한다는 속설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옛 능에 세워져 있던 석인상과 망주석 등 재사용할 수 있는 석물은 그대로 새 능으로 옮겨와 인렬왕후 능 조성시인 1636년에 제작된 것을 거의 재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있던 장릉(長陵)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되어 합장능이 되었다. 현재 비공개릉으로 자유롭게 출입 할 수 없다. 장릉은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능제(陵制)로, 조선왕릉 중 가장 넓은 참도가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 지가 유배지를 탈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한씨는 그를 죽인다면 우리 자손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단호한 말투로 설득했다. 그러나 지는 품속에 황해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있어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자결토록 했다.

인렬왕후 한씨는 배가 엎어져 있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인조에게 인심을 잃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등, 정통성이 부족한 인조가 또 다른 반정세력에게 쫓겨나지 않도록 애썼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쭃겨난 것도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며, 인조도 광해군과 같은 전철을 밟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씨는 살생은 살생을 부른다는 진리를 깊이 깨닫고, 남편 인조가 살생을 저지르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내조에 힘썼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으로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가 후원을 사치스럽게 만들고자 할 때도 지난날을 되새겨주며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한씨는 인조가 즉위한 이후 해마다 흉년이 들자 적극 나서서 기민(饑民:곡식을 나누어 줌)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에 사가(私家)에서는 왕실에서 기민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앞을 다투어 곡식이며 옷가지들을 들고 와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씨의 이러한 내조는 인조 등극 이후 인심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43세의 나이로 창경궁 여휘당에서 7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렬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했다.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의관들을 문초(問招)하고 출산을 도왔던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을 강령으로 유배보냈다.

"

장남인 소현세자와 강빈의 장남 석철이 이 직후에 태어났는데, 할머니(인렬왕후)의 관이 혼전(魂殿)에 모셔져 있던터라, 아버지인 소현세자는 상주로서 장례진행을 도맡아야했고, 어머니는 할머니 대신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기에 보통 원손(元孫) 탄생 시의 축하행사를 대폭 생략해야 했다. 어짐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렬(烈)이라 하여 인렬(仁烈)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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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렬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비석은 6.25전쟁 때 불탄것을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것도 도로 코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 의향대로 할 수 없다하여 바꾼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2편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했다. 본래 조선왕실에서는 차기 왕위를 이을 세자가 부재할 경우 세자의 아들인 원손(元孫)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한 채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소현세자의 아내)를 사사(賜死)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행동은 훗날 예송(禮訟)논쟁의 씨앗을 심어놓게 된다.

후사도 없이 온갖 박대를 받으며 외롭게 지내는 계모 장렬왕후를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된 봉림대군은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이지만 진심으로 공경하였다. 문안을 드리지 말라는 부왕 인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은 계속 장렬왕후를 찾아가서 문후를 드리며 정성껏 효도했다. 그때마다 장렬왕후는 몹시 고마워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던 날 조소용이 장렬왕후가 인조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게 하자, 봉림대군은 조소용을 쫓아내고 장렬왕후를 모셔 오도록 했다. 1649년(인조27년) 5월 8일 인조는 세상을 떠났다. 장렬왕후는 효종의 효성으로 대비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거의 궁중의 안방마님을 차지하던 소용 조씨가 몰락한 것은 장렬왕후가 직접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장렬왕후가 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소용 조씨가 며느리인 신씨(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내)를 박대하고 여종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자, 신씨는 장렬왕후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장렬왕후가 영이를 문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가 저지른 모든 짓들을 자복해버린 것이다. 1651년(효종2년) 소용 조씨는 자신이 낳은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게 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사위의 아버지 김자점 등은 역모혐의로 사사되었고, 숭선군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

효종의 극진한 효성 덕분에 장렬대비는 궁궐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족보상으로 증손자(인조의 증손자)가 되는 숙종 이순이 조선의 제19대 임금으로 즉위 후,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 조씨는 한 궁녀를 총애하여 자신의 처소로 들였는데, 이 궁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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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행동이 매우 방자하고 남인 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대비 김씨명성왕후:현종 비는 곱게 보지 않았다.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담대해서 남편인 현종이 후궁을 두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고, 정사(政事)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왕후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 장씨를 가차없이 내쫓아버렸다. 요즘 세상에서도 며느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닌데, 지금보다 훨씬 더 유교적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궁녀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죽은 뒤에는 비로소 왕실의 큰 어른(대왕대비)으로서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하여 내명부를 통솔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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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장렬왕후 조씨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셋째 딸로, 조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집안이었다. 인조의 원비(元妃) 인렬왕후 한씨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나자, 3년 뒤 인조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嘉禮)를 올려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조는 44살이니 무려 29살 차이가 난다.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더 어렸고, 손자인 현종과도 겨우 16살 차이였다. 하지만 가례를 올린 첫 날을 제외하고 인조는 장렬왕후를 찾지 않았다.

인조와 장렬왕후 조씨 간의 나이 차이가 많고, 인조는 당시 소용 조씨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20세의 나이에 풍병(風病)까지 오는 등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또한 중전이 머물러야 할 전각(殿閣)을 소용 조씨에게 내주고, 1645년 경덕궁으로 옮기는 등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인조가 새 중전을 뽑을 때, 아버지 조창원은 딸에게 "무조건 밉보여 왕비 후보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했으나, 장렬왕후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본인 스스로 왕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김상궁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 결국 왕비로 간택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으며,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숙종 14년(1688) 사망했는데, 인조·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렬왕후는 국모(國母)가 되기는 했지만 15살 밖에 안 된 어린나이라 내명부를 다스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인조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한 장렬왕후에게 가장 큰 장애는 인조의 무한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소용 조씨였다. 소용 조씨는 숭선군을 낳고 반정 공신 김자점의 세력을 등에 업으면서 마치 중전처럼 행세할 정도로 권세가 대단했다.

조 소용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비 조씨는 소용 조씨에게 눌려 죽은 듯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장렬왕후 조씨는 아이를 못 낳는 열등감으로 움추려 들었고, 인조가 장렬왕후 조씨의 침소에 들르려고 해도 조소용이 늘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했다. 그러나 장렬왕후 조씨는 비록 나이는 어려도 후궁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넓은 아량을 보여 덕망 높은 중전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647년(인조25년) 5월 조소용의 농간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그 중 석철과 석린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인조도 손자들의 죽음이 누구의 농간인지 알면서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어린 왕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는 오직 왕비 조씨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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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인렬왕후가 죽은 1년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45)와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1619-59) 내외가 청(淸)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한씨가 살아 있었을 때는 궁궐 내명부들의 위계질서가 바로 섰지만, 그녀가 죽자 그 위계질서는 깨지고 말았다. 물론 3년 후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들어왔지만 15살의 장렬왕후는 세자보다도 더 어려 권위가 견고하지 못했고, 내명부를 다스릴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부터 줄곧 병치레를 하던 소현세자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동안 청나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인조와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탐탁찮게 여긴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계비(繼妃)인 장렬왕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수렴청정을 해 줄만큼의 역량이 있는 왕실 어른 인렬왕후가 살아있었다면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세등등한 후궁들이 급기야 세자빈 강씨까지 모함하기에 이르렀고, 인조는 마침내 아들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비정한 부왕이 되고 말았다. 평생 남편에게 매사 조심할 것을 권하며 내조하던 한씨가 10년만 오래 살았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인렬왕후의 능호(陵號)는 장릉(長陵)이다. 인조는 인렬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내 쌍릉이 되었다. 능 자리를 정하는 과정에서 장릉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인조가 유명(遺命)을 내린 것이었기에 효종은 인렬왕후 옆에 장사지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그대로 실현되었다.

세월이 흘러 능침에 여러 번 탈이 나자 숙종 연간에 들어서 풍수가 좋지 못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숙종에게 천릉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장릉의 천릉(遷陵)은 실현되지 못했다.

영조는 등극한 후, 숙종 연간에 장릉을 천릉하려는 논의가 있었음을 처음 듣게 되었다. 이곳에 뱀이 종종 출몰한다고 하면서 장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에도 뱀을 보았으나 총호사 김자점이 숨기고 그대로 봉한 사실과 장릉의 지리가 나빠 뱀이 출몰한다는 속설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옛 능에 세워져 있던 석인상과 망주석 등 재사용할 수 있는 석물은 그대로 새 능으로 옮겨와 인렬왕후 능 조성시인 1636년에 제작된 것을 거의 재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있던 장릉(長陵)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되어 합장능이 되었다. 현재 비공개릉으로 자유롭게 출입 할 수 없다. 장릉은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능제(陵制)로, 조선왕릉 중 가장 넓은 참도가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 지가 유배지를 탈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한씨는 그를 죽인다면 우리 자손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단호한 말투로 설득했다. 그러나 지는 품속에 황해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있어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자결토록 했다.

인렬왕후 한씨는 배가 엎어져 있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인조에게 인심을 잃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등, 정통성이 부족한 인조가 또 다른 반정세력에게 쫓겨나지 않도록 애썼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쭃겨난 것도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며, 인조도 광해군과 같은 전철을 밟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씨는 살생은 살생을 부른다는 진리를 깊이 깨닫고, 남편 인조가 살생을 저지르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내조에 힘썼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으로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가 후원을 사치스럽게 만들고자 할 때도 지난날을 되새겨주며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한씨는 인조가 즉위한 이후 해마다 흉년이 들자 적극 나서서 기민(饑民:곡식을 나누어 줌)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에 사가(私家)에서는 왕실에서 기민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앞을 다투어 곡식이며 옷가지들을 들고 와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씨의 이러한 내조는 인조 등극 이후 인심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43세의 나이로 창경궁 여휘당에서 7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렬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했다.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의관들을 문초(問招)하고 출산을 도왔던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을 강령으로 유배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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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인 소현세자와 강빈의 장남 석철이 이 직후에 태어났는데, 할머니(인렬왕후)의 관이 혼전(魂殿)에 모셔져 있던터라, 아버지인 소현세자는 상주로서 장례진행을 도맡아야했고, 어머니는 할머니 대신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기에 보통 원손(元孫) 탄생 시의 축하행사를 대폭 생략해야 했다. 어짐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렬(烈)이라 하여 인렬(仁烈)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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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렬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비석은 6.25전쟁 때 불탄것을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것도 도로 코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 의향대로 할 수 없다하여 바꾼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