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 인조의 여인들, 장렬왕후 1편
장렬왕후 조씨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셋째 딸로, 조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집안이었다. 인조의 원비(元妃) 인렬왕후 한씨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나자, 3년 뒤 인조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嘉禮)를 올려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조는 44살이니 무려 29살 차이가 난다.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더 어렸고, 손자인 현종과도 겨우 16살 차이였다. 하지만 가례를 올린 첫 날을 제외하고 인조는 장렬왕후를 찾지 않았다.
인조와 장렬왕후 조씨 간의 나이 차이가 많고, 인조는 당시 소용 조씨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남기지 못했고, 20세의 나이에 풍병(風病)까지 오는 등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또한 중전이 머물러야 할 전각(殿閣)을 소용 조씨에게 내주고, 1645년 경덕궁으로 옮기는 등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인조가 새 중전을 뽑을 때, 아버지 조창원은 딸에게 "무조건 밉보여 왕비 후보에서 떨어져야 한다."고 했으나, 장렬왕후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본인 스스로 왕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김상궁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 결국 왕비로 간택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으며,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숙종 14년(1688) 사망했는데, 인조·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렬왕후는 국모(國母)가 되기는 했지만 15살 밖에 안 된 어린나이라 내명부를 다스리기는 매우 어려웠다. 인조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한 장렬왕후에게 가장 큰 장애는 인조의 무한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소용 조씨였다. 소용 조씨는 숭선군을 낳고 반정 공신 김자점의 세력을 등에 업으면서 마치 중전처럼 행세할 정도로 권세가 대단했다.
조 소용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비 조씨는 소용 조씨에게 눌려 죽은 듯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장렬왕후 조씨는 아이를 못 낳는 열등감으로 움추려 들었고, 인조가 장렬왕후 조씨의 침소에 들르려고 해도 조소용이 늘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했다. 그러나 장렬왕후 조씨는 비록 나이는 어려도 후궁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넓은 아량을 보여 덕망 높은 중전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647년(인조25년) 5월 조소용의 농간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가서 그 중 석철과 석린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인조도 손자들의 죽음이 누구의 농간인지 알면서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어린 왕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는 오직 왕비 조씨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