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3편
인렬왕후가 죽은 1년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장남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45)와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1619-59) 내외가 청(淸)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한씨가 살아 있었을 때는 궁궐 내명부들의 위계질서가 바로 섰지만, 그녀가 죽자 그 위계질서는 깨지고 말았다. 물론 3년 후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들어왔지만 15살의 장렬왕후는 세자보다도 더 어려 권위가 견고하지 못했고, 내명부를 다스릴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부터 줄곧 병치레를 하던 소현세자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동안 청나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인조와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탐탁찮게 여긴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계비(繼妃)인 장렬왕후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수렴청정을 해 줄만큼의 역량이 있는 왕실 어른 인렬왕후가 살아있었다면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세등등한 후궁들이 급기야 세자빈 강씨까지 모함하기에 이르렀고, 인조는 마침내 아들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비정한 부왕이 되고 말았다. 평생 남편에게 매사 조심할 것을 권하며 내조하던 한씨가 10년만 오래 살았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인렬왕후의 능호(陵號)는 장릉(長陵)이다. 인조는 인렬왕후의 장릉(長陵) 곁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어두었으며, 인조 승하 후 효종이 그곳에 아버지를 봉릉하고 장사지내 쌍릉이 되었다. 능 자리를 정하는 과정에서 장릉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인조가 유명(遺命)을 내린 것이었기에 효종은 인렬왕후 옆에 장사지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그대로 실현되었다.
세월이 흘러 능침에 여러 번 탈이 나자 숙종 연간에 들어서 풍수가 좋지 못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숙종에게 천릉할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장릉의 천릉(遷陵)은 실현되지 못했다.
영조는 등극한 후, 숙종 연간에 장릉을 천릉하려는 논의가 있었음을 처음 듣게 되었다. 이곳에 뱀이 종종 출몰한다고 하면서 장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에도 뱀을 보았으나 총호사 김자점이 숨기고 그대로 봉한 사실과 장릉의 지리가 나빠 뱀이 출몰한다는 속설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옛 능에 세워져 있던 석인상과 망주석 등 재사용할 수 있는 석물은 그대로 새 능으로 옮겨와 인렬왕후 능 조성시인 1636년에 제작된 것을 거의 재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원래 파주 운천리(雲川里)에 있던 장릉(長陵)은 현재의 파주 갈현리로 이장되어 합장능이 되었다. 현재 비공개릉으로 자유롭게 출입 할 수 없다. 장릉은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능제(陵制)로, 조선왕릉 중 가장 넓은 참도가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