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8일 월요일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 인조의 여인들, 인렬왕후 한씨 2편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 지가 유배지를 탈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한씨는 그를 죽인다면 우리 자손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단호한 말투로 설득했다. 그러나 지는 품속에 황해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있어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자결토록 했다.

인렬왕후 한씨는 배가 엎어져 있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인조에게 인심을 잃으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등, 정통성이 부족한 인조가 또 다른 반정세력에게 쫓겨나지 않도록 애썼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쭃겨난 것도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며, 인조도 광해군과 같은 전철을 밟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씨는 살생은 살생을 부른다는 진리를 깊이 깨닫고, 남편 인조가 살생을 저지르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내조에 힘썼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으로 민심은 인조에게 향했다고 한다. 인조가 후원을 사치스럽게 만들고자 할 때도 지난날을 되새겨주며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한씨는 인조가 즉위한 이후 해마다 흉년이 들자 적극 나서서 기민(饑民:곡식을 나누어 줌)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에 사가(私家)에서는 왕실에서 기민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앞을 다투어 곡식이며 옷가지들을 들고 와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씨의 이러한 내조는 인조 등극 이후 인심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36년, 당시로는 적지 않은 43세의 나이로 창경궁 여휘당에서 7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왕자는 곧 죽었고, 인렬왕후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는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7일도 채 되지 않아 산실에서 사망했다. 인조는 왕비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의관들을 문초(問招)하고 출산을 도왔던 왕실의 봉보부인인 응옥을 강령으로 유배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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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인 소현세자와 강빈의 장남 석철이 이 직후에 태어났는데, 할머니(인렬왕후)의 관이 혼전(魂殿)에 모셔져 있던터라, 아버지인 소현세자는 상주로서 장례진행을 도맡아야했고, 어머니는 할머니 대신 내명부를 총괄해야 했기에 보통 원손(元孫) 탄생 시의 축하행사를 대폭 생략해야 했다. 어짐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렬(烈)이라 하여 인렬(仁烈)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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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인동(仁洞)은 그녀의 출생지인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인근 개운동에 ‘인렬왕후 탄생지비(誕生地碑)’가 있다. 이 비석은 6.25전쟁 때 불탄것을 이후에 새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언덕이나 도시 외곽에 보존되어 있는 여타 비석들과 다르게 도심 한복판, 그것도 도로 코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길 원하였으나, 대사헌이었던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 의향대로 할 수 없다하여 바꾼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