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란胡亂 8편
■ 호란(胡亂) 8편
임경업은 명에 투항한 후 평로장군, 총병 등의 직위로 활약하다가 남경이 함락되고 명나라가 청에 의해 멸망하면서 다시 청군에게 체포되었다. 임경업(林慶業)이 청에게 체포된 것을 안 인조는 임경업의 소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것은 그를 적진에서부터 구해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일어난 한 역모사건에 임경업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경업은 조선으로 송환되어 친국(親鞫:왕이 친히 심문)을 받으면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아까운 장수 하나가 또 이렇게 죽었다. 임경업(林慶業)을 청나라를 배척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여겼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이 후 임경업의 무용담을 담은 작자 미상의 《임경업전》이 나돌아 널리 읽혔으며, 무속에서는 임경업의 화상(畫像)을 신당(神堂)에 모시고 최영, 남이와 함께 가장 영험이 있는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전쟁을 맞이해서도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사령관을 잘못 임명한 것이었다. 총사령관 김자점은 친청(親淸)파였고, 청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한양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임경업은 그 뒤 청나라 태종의 조카인 요퇴(要魋)가 300기의 정예기병을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이 요퇴군을 맞아 압록강에서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120여 명과 말 60여 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병자호란 중 그나마 유일한 승리의 기록일 것이다. 그래서 임경업은 조선민중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병자호란은 가장 짧은 기간 내 조선의 수십만 백성들이 죽고, 또 수십만 백성이 납치 되어 중국 땅으로 끌려간 일반 백성들이 엄청난 피해를 본 우리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또한 병자호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한 전쟁이기도 했다.
청군이 포로로 끌고 간 조선인이 수만에 이르렀다(수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도 있음). 그런데 이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오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잡아 다시 보내야만 했고, 따라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 즉 돈을 주고 사오는 길밖에 없었다. 붙잡혀 간 사람을 데려오는 속환 금액은 갈수록 천정부지로 뛰어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의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나라에 이혼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거나 자결(自決)을 강요하였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런 저런 다른 이유를 달아 어렵게 돌아온 부녀자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정에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은 이 여인들로 하여금 냇물(홍제천)에 몸을 씻으면 그들의 정절이 회복되는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조처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