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7일 일요일

비변사備邊司 2편

■ 비변사備邊司 2편

■ 비변사(備邊司) 2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를 전쟁 수행의 최고 기구로 활용함에 따라 그 기능이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이때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請兵), 둔전(屯田),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貞節)의 표창 등의 기능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비변사는 군무(軍務)에 대한 처리뿐만 아니라 지방관 임명 ·조세·사회 복지·조직 제·개편 등 주요 국정(國政) 전반을 관장하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시적으로 그 기능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비변사가 전쟁 수행을 이유로 6조의 권한을 대부분 가져갔는데 이를 원상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북인(北人)정권은 전후 복구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정권도 후금과의 전쟁 이후 정권 장악을 위해 새 군영 설치와 더불어 비변사를 전략적으로 강화시켰다.

결국 17세기 이후 의정부 3정승은 물론이고 공조를 제외한 5조판서(判書)와 군문 대장 등이 모두 비변사 당상(堂上)으로 참여함에 따라 최고 정치 기구가 되었고, 기존의 의정부-6조 체제를 무력화시켰다. 비변사의 강화는 18세기 조선의 왕권 강화를 이끈 숙종 - 영조 - 정조로 이어지는 왕들의 역할도 컸다.

이들이 이조(吏曹) 전랑의 낭천권(郎薦權:인사권)을 폐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비변사의 권한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물론 국왕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시기에 비변사는 최고 정치 기구이면서도 왕의 명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국정 운영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권이 약화된 이후에는 크게 변질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세도정치 기간에 비변사는 아무런 견제 없이 큰 권한을 휘두르며 전횡(專橫)을 일삼았다. 외척인 세도 가문이 다른 외척의 형성을 막고 국왕의 권력을 억제하면서 비변사는 자연스럽게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의 도평의사사가 권문세족의 권력 핵심 기구로 작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변사는 세도정치의 핵심 기구가 되어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른다.

비변사는 비빈(妃嬪)의 간택에까지 깊숙이 관여하면서 외척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비변사 제조(提調:관리)의 천거 및 임명을 주도하면서 자체적인 인사권을 확보하였다. 비변사는 국정 전반을 관장하면서도 내부 인사권을 쥐고 있어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세도정치기에 왕실의 종친(宗親)들조차 세도 가문의 눈치를 보면서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왕권이 약화되었으므로, 지존(至尊)인 국왕에게도 비변사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후 고종의 등극과 함께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개혁하게 된다. 대원군이 집권을 시작한 1864년(고종 1년) 기존의 외교·국방·치안 관계 업무만을 비변사가 담당하게 하고 나머지 사무는 모두 의정부로 이관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는 비변사의 남은 기능 중 군무(軍務)는 부활한 삼군부(三軍府)로 넘기고, 나머지 업무는 의정부로 이관하여 결국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